한국 현대시의 전무후무할 패러디 교본
한국 현대시의 전무후무할 패러디 교본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3.2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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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열전(詩人列傳)
현대시인 721명의 특정·이미지 등 패러디
시인에 대한 지은이의 느낌을 시로 표현
시인 열전 표지
시인 열전 표지

헌책방지기를 하다보면 한꺼번에 다량의 책이 들어오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그럴 때마다 무거운 책을 다루려면 몸은 힘들지만 정리하면서 만나게 되는 조금은 특별한(?) 책에 대한 막연한 어떤 기대감 같은 게 있다. 어떤 책이 더 좋다 안 좋다 같은 평가가 아닌 남다른 책에 대한 약간의 설렘이랄까.

그런 책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정리는 뒷전이고 그 남다름에 빠져 뒤적뒤적 살펴보다가 나중에 자세히 봐야지 하며 한곳에 갈무리해 놓는다. 하지만 그 때 그 느낌뿐이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 그만 새까맣게 잊고 산다. 그러다가 그 책과 관련된 책이 들어올 때면 ‘아 그렇고 그런 책이 있었지’하며 한쪽 구석에 놓여있던 책을 다시 꺼내본다. 이제야 제짝을 찾았다는 소소한 기쁨에 나란히 놓고 다시 살펴본다. 함께 하니 보기 좋다. 오늘은 그랬던 책 가운데 한 권을 소개해 보련다.

바로 김대규(金大圭 1942~2018) 시인의 “시인열전(詩人列傳)”(토담미디어)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여러 사람의 전기를 차례로 벌여 기록한 책’이라는 뜻을 가진 ‘열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두툼한 책이 시집이었던 데다 ‘한국 현대시의 전무후무할 패러디 교본!’이라는 출판사에서 내걸은 슬로건이 이 책에 눈길이 간 이유였다.

스스로 ‘최남선 이후의 한국 현대시인 721명에 대한 시인의 특정 시어나 시행, 이미지나 스타일, 주제의식이나 캐릭터 등을 패러디한 1인 1매 원칙의 실명 시집’(시인의 말)이라 소개한 이 책은 말 그대로 대상 시인에 대한 지은이의 느낌을 시로 표현한 책이다.

시인열전에 실린 기형도 시인 편
시인열전에 실린 기형도 시인 편

예를 들면 저자가 ‘나 다시 땅으로 돌아가리라, 오랜 잠의 하늘나라 소풍도 끝냈으니’라고 노래한 시인은 누구겠는가. 눈치 채셨겠지만, 그 대상은 바로 천상병 시인이다. 대부분 그런 식으로 표현돼 있지만, 개중에는 아주 특별한 편들도 있다.

제일 짧은 건 기형도 시인 편으로 ‘야, 임마 너 새치기했어!’가 다다. ‘그는 안양의 수리시(修理詩) 동인이었다. 자주 만나 한잔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안타까워 튀어나온 말이다. 죽음의 새치기를 하다니!’라는 지인이의 주(註)가 더 길다.

시어가 아닌 것도 있다. ‘새로운 단어를 찾으려는 노력에서 조형언어를 시(詩)속에 사용했다’(한국시대사전)는 평가를 받았던 홍준현 시인 편에서는 시가 아닌 그림이 그려져 있다. ‘새가 된 사람’이라는 짤막한 주(註)와 함께 이응로 화백의 ‘군상’ 시리즈 같은 느낌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홍 시인의 시를 보니 왜 그리 표현했는지 바로 알겠다.

1988년 을지출판공사에서 간행한 ‘한국시대사전(韓國詩大事典)’에 수록된 시인 1251명 가운데서 대부분의 대상 시인을 선정했다고 밝힌 저자는 이런저런 이유로 함께 수록하지 못한 더 많은 시인들에게는 ‘웬만큼 면구스러운 게 아니다’라며 미안함을 표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의 태어난 집터에서 살면서 평생 문단과 거리를 두고 작품 활동에만 전념했던 시인은 정작 본인을 대상으로 한 패러디 시는 남기지 않았다. 그의 묘비명 시는 ‘열심히 마셨고, 열심히 피웠다’로 시작해서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죽는다’로 끝맺는다. 그런 치열한 삶을 산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이 곧 생긴다고 한다. 꼭 가봐야 할 곳이 한 곳 더 생겼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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