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아온 친구가 달뜬 목소리로 감탄사 연발이다. 추운 날씨에 아파트 입구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꽃이 신기했나 보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군데군데 모여서 흐드러진 산다화를 보며 연거푸 환호성이다. 같이 온 지인도 덩달아 예쁘다고 추임새를 넣는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산다화는 아파트 곳곳에 다섯 그루 혹은 여섯 그루씩 무리 지어 있다가 오늘 같이 추운 겨울 뭉게뭉게 피어서 언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준다.
아파트에 입주하고 스물다섯 해다. 초등학생이던 딸은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며 유치원에 다니던 아들도 장성하여 가정을 꾸릴 나이가 되었다. 아이들이 자라듯 화단의 어린 나무들도 제 자리를 지키며 왕성하게 세력을 키우고, 해마다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곤 하였다. 모과나무 사이사이 후박나무가 하늘을 향해 맘껏 팔을 뻗고, 벚나무 가로수는 해마다 더욱 풍성한 꽃을 피워낸다.
모과나무는 볕이 잘 드는 곳에 심어져 있어서인지 매해 열매를 잘 매달았고, 후박나무는 내가 사는 삼층 높이를 넘어섰다. 누가 누가 잘 자라나 내기를 하듯 소나무 또한 사층을 향해 손을 뻗으며 키재기를 한다.
벚꽃이 봉긋하게 꽃망울을 맺기 시작하면 잊고 지내던 첫사랑을 떠올려보게 한다. 꽃이 피고 지는 동안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베란다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치를 누린다. 즐겨 마시는 믹스커피지만 꽃 내음이 녹아든 커피는 특별해져서 오래도록 음미하며 마시다 보면 식어버린 커피도 아련한 첫사랑 같아 그 시간을 달콤하게 해준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 앞에는 멀구슬나무가 있었다. 같이 산 세월만큼 나무는 해마다 무성한 잎으로 그늘을 만들며 여름을 맞이했다. 빼곡한 가지들 사이로 매미 울음소리가 하도 우렁차서 가끔은 내가 도시에 사는 걸 잊게 하였다. 내일은 늦게 일어나야지…… 하고 마음먹은 날이면 심술을 부리듯 새벽부터 온 동네 새들이 멀구슬나무에 매달려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곤 하였다. 보라색 꽃향기에 달콤하게 취해 있던 날들을 꼽으라면 밤하늘에 별을 헤듯 수많은 날들이었는데 지금은 기억 속에 한 귀퉁이로 자리해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 남구만-
오늘도 이불 속에 누워 새들의 수다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옛 시조를 떠올린다. 아마도 날로 게을러지는 나에게 새해에는 부지런히 살라고 덕담을 들려주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 부부의 얼굴에 주름살이 더해질 때마다 나무들도 늘어나는 나이테 사이사이 오늘의 일기를 빼곡하게 새기고 있으리라.
나무가 많은 곳에서 산다는 건 날로 삭막해지는 메마른 감성에 시나브로 스미는 빗방울 같은 것, 신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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