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주는 행복
나무가 주는 행복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1.04 19: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희 시인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가 달뜬 목소리로 감탄사 연발이다. 추운 날씨에 아파트 입구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꽃이 신기했나 보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군데군데 모여서 흐드러진 산다화를 보며 연거푸 환호성이다. 같이 온 지인도 덩달아 예쁘다고 추임새를 넣는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산다화는 아파트 곳곳에 다섯 그루 혹은 여섯 그루씩 무리 지어 있다가 오늘 같이 추운 겨울 뭉게뭉게 피어서 언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준다.

아파트에 입주하고 스물다섯 해다. 초등학생이던 딸은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며 유치원에 다니던 아들도 장성하여 가정을 꾸릴 나이가 되었다. 아이들이 자라듯 화단의 어린 나무들도 제 자리를 지키며 왕성하게 세력을 키우고, 해마다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곤 하였다. 모과나무 사이사이 후박나무가 하늘을 향해 맘껏 팔을 뻗고, 벚나무 가로수는 해마다 더욱 풍성한 꽃을 피워낸다.

모과나무는 볕이 잘 드는 곳에 심어져 있어서인지 매해 열매를 잘 매달았고, 후박나무는 내가 사는 삼층 높이를 넘어섰다. 누가 누가 잘 자라나 내기를 하듯 소나무 또한 사층을 향해 손을 뻗으며 키재기를 한다.

벚꽃이 봉긋하게 꽃망울을 맺기 시작하면 잊고 지내던 첫사랑을 떠올려보게 한다. 꽃이 피고 지는 동안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베란다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치를 누린다. 즐겨 마시는 믹스커피지만 꽃 내음이 녹아든 커피는 특별해져서 오래도록 음미하며 마시다 보면 식어버린 커피도 아련한 첫사랑 같아 그 시간을 달콤하게 해준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 앞에는 멀구슬나무가 있었다. 같이 산 세월만큼 나무는 해마다 무성한 잎으로 그늘을 만들며 여름을 맞이했다. 빼곡한 가지들 사이로 매미 울음소리가 하도 우렁차서 가끔은 내가 도시에 사는 걸 잊게 하였다. 내일은 늦게 일어나야지…… 하고 마음먹은 날이면 심술을 부리듯 새벽부터 온 동네 새들이 멀구슬나무에 매달려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곤 하였다. 보라색 꽃향기에 달콤하게 취해 있던 날들을 꼽으라면 밤하늘에 별을 헤듯 수많은 날들이었는데 지금은 기억 속에 한 귀퉁이로 자리해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 남구만-

오늘도 이불 속에 누워 새들의 수다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옛 시조를 떠올린다. 아마도 날로 게을러지는 나에게 새해에는 부지런히 살라고 덕담을 들려주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 부부의 얼굴에 주름살이 더해질 때마다 나무들도 늘어나는 나이테 사이사이 오늘의 일기를 빼곡하게 새기고 있으리라.

나무가 많은 곳에서 산다는 건 날로 삭막해지는 메마른 감성에 시나브로 스미는 빗방울 같은 것, 신의 축복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