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과 기생의 사회학
공생과 기생의 사회학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12.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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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태 시인·다층 편집주간

한동안 오름만을 찾아다녔다. 요즈음도 주말만 되면 새벽에 달랑 가방 하나 짊어지고 오름을 향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다치면 사람을 외면하고 자연을 찾게 된다고 했던가. 내가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서 그런가, 오름을 찾으면 모든 것에서 벗어나 편안해지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한다. 

자연으로 스며들어 세상과 인연을 끊다시피하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사오십대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다는 뉴스를 들은 적도 있다. 그들이 무슨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 무위자연과 소요유의 노장철학이나 자연인의 철학사상, 혹은 도가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병에 쫓기고, 사람에 쫓기고, 삶에 쫓긴 나머지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태반이다.

다만 자연은 아무런 조건 없이 찌든 사람들을 말없이 품어주기에, 그들은 그곳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워버린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자연의 일부가 되어 문명과는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현대 우리 사회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고, 자연을 갈망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이슬이 깔린 길을 걸어 오름을 오르다 보면 온갖 풀과 꽃과 나무가 말없이 지나가는 나에게 말없이 눈길을 준다. 나도 나름대로 한마디씩 말을 건네면서 오른다. 그렇게 오르다 보면, 요즘처럼 낙엽을 끝내고 한수(寒樹)가 되어 있어야 할 나무가 싱싱한 이파리를 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자세히 보면, 다른 나무에 기대어 감고 올라간 넝쿨식물이다. 제 스스로 몸을 세워 광합성을 할 수 없으니 다른 나무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 대표적인 수종으로 줄사철, 바위수국, 송악, 담쟁이 종류가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작 기둥이 되는 나무는 시달리다가 죽어서 앙상한데, 자신은 싱싱한 잎을 자랑하고 있다. 자신의 장래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래지 않아 저 나무가 썩어 쓰러지고 나면, 결국 넝쿨식물은 바닥으로 널브러져 연명하다가 다른 나무들이 햇빛을 가리고 광합성의 방해를 받으면 말라 죽게 될 것이다.

인간 사회도, 사람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기업이 망해도 노동자의 권리만을 부르짖는 강성노조, 빈둥거리며 부모에게 의지해 사는 젊은이들, 국가의 지원만을 바라며 스스로 일어서려 하지 않는 일부 국민들에 이르기까지. 물론 일어설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사회 제도의 문제도 없는 것은 아니다. 

굳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을 차용하지 않더라도 사지육신 멀쩡함에도 스스로 일어서려 하지 않거나, 노력에 비해 과도한 대가를 바라거나, 일방적인 수혜만을 바라는 이들을 환대할 곳은 없다. 자력갱생의 의지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은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수도 있지 않은가. 

세상이 나를 쓰러뜨리려 해도 나 스스로가 쓰러지지 않는다면 결코 쓰러지지 않으리라는 강인한 의지가 있다면 흔들릴망정 쓰러지지 않을 것이요, 쓰러질지라도 곧 일어서는 힘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뿐만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관계도 기생이 아닌 상리공생(相利共生)의 관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일방적인 시혜와 수혜의 관계는 어느 순간 한쪽이 무너지게 되면 공멸의 길을 걸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타인을 부정하는 사람은 결국 그들에 의해 부정당하게 될 것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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