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 기로 선 이웃 위해 생명 나눔 앞장 '팬데믹 영웅'
생사 기로 선 이웃 위해 생명 나눔 앞장 '팬데믹 영웅'
  • 고경호 기자
  • 승인 2021.12.09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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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제주인] 12. ‘팬데믹 영웅’ 헌혈 700회 진성협씨
진성협씨가 지난 8일 제주시내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고경호 기자
진성협씨가 지난 8일 제주시내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고경호 기자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혈액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대체 역시 불가능합니다.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에게 수혈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헌혈뿐입니다.”

끝 모를 팬데믹 상황에 맞서는 힘은 방역 수칙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는 시민들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변 이웃들에게 나눔을 베풀고, 방역 최일선에서 헌신하는 ‘팬데믹 영웅’들이 있기 때문에 ‘포스트 코로나’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본지는 코로나19 사태로 심화되고 있는 혈액 수급난을 해소하기 위해 헌혈은 물론 헌혈을 통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또 다른 팬데믹 영웅 진성협씨(58)를 만났다.

#‘1초의 찡그림’이 중독으로

진씨는 고등학생이던 1981년 서울역에서 처음으로 헌혈했다. 그를 헌혈 버스에 오르게 한 건 친구였다.

진씨는 “운동을 참 잘했던 초등학교 동창이 ‘재생불량성 악성빈혈’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속적으로 수혈을 받아야 하는 병인데 당시에는 보험 적용이 안돼서 많이 어려워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제주에서 동창들이 헌혈 증서를 모아 돕고 있다는 걸 알게 돼 곧장 헌혈했다”고 말했다.

그 전까지 진씨는 헌혈에 대해 오히려 거부감이 있었다.

진씨는 “중학생 때 다니던 학원가에 항상 헌혈 버스가 세워져 있었다. 그 때는 헌혈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닌데도 헌혈을 권장하는 직원들이 내 덩치만보고 반강제적으로 헌혈 버스에 태우는 일이 다반사였다”며 “그리고 헌혈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들도 있어서 친구의 투병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사실 헌혈을 좀 꺼려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처음 마주하게 된 ‘1초의 찡그림’이 진씨를 바꿔놓았다.

수혈이 필요한 환자에게 내 피를 줄 수 있다는 뿌듯함과 동시에 헌혈 후 느낄 수 있는 긍정적인 몸의 변화들이 그를 ‘헌혈 중독’에 이르게 했다.

진씨는 “젊었을 때는 헌혈하고 나면 혈액 순환이 빨리되니깐 몸이 가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 몸의 기분 좋은 변화에다 타인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게 딱 맞아 떨어졌다. 헌혈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헌혈 위해 점심마다 오름행

서울역에서 처음으로 헌혈한 진씨는 제주에 내려와서도 꾸준히 헌혈했다.

그리고 ‘헌혈은 남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나눠주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이자 고귀한 희생의 산물’이라는 좌우명도 마음에 새겼다.

그렇게 1981년부터 현재까지 만 40년 간 진씨는 전혈 64회, 성분헌혈 636회 등 총 700회나 헌혈했다.

전혈은 한 번에 400㏄, 성분헌혈은 500㏄의 피를 뽑는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보면 진씨가 타인에게 내어준 피는 무려 34만3600㏄나 된다. 리터로 환산하면 343.6ℓ로, 드럼통 2개와 맞먹는다.

헌혈하려면 내 몸이 건강해야 한다. 그래서 진씨는 한국남부발전㈜ 남제주빛드림본부 감사팀 과장으로 일하면서 매일 점심시간마다 오름을 오른다.

진씨는 “아파서 약을 먹으면 헌혈을 못한다. 약 성분마다 헌혈을 못하는 기간도 다른데 탈모 예방제는 복용 후 6개월이나 헌혈하면 안 된다”며 “헌혈하려면 약을 먹어선 안 되고, 약을 안 먹으려면 건강해야 한다. 그래서 25년째 점심시간마다 견과류를 입에 털어 넣으면서 오름을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헌혈을 위해 건강을 관리하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 노력 덕분에 백혈병 환자와 장출혈 환자, 심장판막증환자, 소아암 환자 등 생사의 기로에 선 수많은 환자들이 그의 헌혈 증서를 받아 수혈했다.

진성협씨가 지난 5일 대한적십자사 제주도혈액원 헌혈의집 신제주센터에서 제주 최초로 700회 헌혈을 달성한 후 헌혈 증서를 받아들고 미소 짓고 있다. 진성협씨 제공
진성협씨가 지난 5일 대한적십자사 제주도혈액원 헌혈의집 신제주센터에서 제주 최초로 700회 헌혈을 달성한 후 헌혈 증서를 받아들고 미소 짓고 있다. 진성협씨 제공

#어려운 이웃 향한 나눔 손길

팬데믹 영웅의 활약은 헌혈에만 그치지 않는다. 

학교나 직장, 군부대 등 단체헌혈이나 가두헌혈에 참여해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헌혈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10년 넘게 헌혈 후 받은 기념품을 ‘취약계층 백혈병 소아암 환아 치료비 지원사업’ 등에 기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93년 12월 ‘나눔적십자봉사회’를 결성한 이후 현재까지 무려 3만2550시간이나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혼자사는 노인 방문 봉사부터 주거환경개선, 소년소녀가장 방문 봉사, 사회복지시설 방문 봉사, 해외 봉사 등 이웃을 위한 그의 나눔의 손길은 장소와 시간, 국적까지 가리지 않고 어디든 향한다.

헌혈과 봉사에 대한 조건 없는 열정은 지역사회는 물론 정부도 인정하고 있다.

헌혈과 사회복지, 국민보건향상 공로로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은 네 번이나 받았으며, 2015년에는 대통령표창도 받았다.

이외에도 자랑스러운 제주도민상, 헌혈유공장 최고명예대장, 자원봉사유공장 최고명예대장 등도 수상했다.

#나와 가족 지키는 헌혈 “동참 절실”

타인의 생명을 살리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살아온 진씨에게도 코로나19는 가장 큰 걱정이다.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단체헌혈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혈액 수급난이 거듭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진씨는 “응급환자인데도 곧바로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다. 병원에 가보면 당장 수술이 필요한 상황임에도 보호자가 지정 헌혈을 해야만 수술이 가능한 상황”이라며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진씨는 헌혈이 필요한 이유, 그리고 왜 헌혈해야 하는 지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혈액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다. 국민들이 서로 자급자족해야 한다. 혈액이 없다보니 매년 500억원을 들여 혈액을 수입해오면서 외화 낭비가 반복되고 있다”며 “무엇보다 내 자신이나 가족,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이 때 필요한 게 헌혈 증서다. 헌혈을 해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고 피력했다.

끝으로 그는 “코로나19 사태가 지속되고 있는 만큼 개인헌혈이 늘어야 한다. 도민들의 동참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지금도 헌혈할 때 따끔하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진씨는 “주사를 놓는 부위가 아예 딱딱해져서 이제는 따끔하지도 않는다. 대신 간호사분들이 애를 먹으신다”면서 “헌혈은 만 69세까지 가능하다. 내 몸이 허락한다면 남은 11년을 꽉꽉 채워 헌혈하고 싶다”며 미소 지었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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