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바다에 목숨 맡긴 제주 탐험가의 ‘불굴의 정신’
거친 바다에 목숨 맡긴 제주 탐험가의 ‘불굴의 정신’
  • 고경호 기자
  • 승인 2021.12.09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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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제주인] 11. 채바다 고대해양탐험가
고대해양탐험가 채바다씨가 지난 6일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고경호 기자
고대해양탐험가 채바다씨가 지난 6일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고경호 기자

‘바람에 흐르다가 / 파도에 밀리다가 / 캄캄한 밤이 되면 / 별빛 등대 삼아 / 뱃길 찾아간다 / 물길 노 저어 간다 / 앞서거니 뒤서거니 물굽이 돌며 / 거센 파도에 업혀 간다 / 날센 바람에 실려 간다 / 동녘 하늘로 / 열도(열도)를 찾아 / 선조들이 넘나들던 현해탄 너머로’(채바다 작 ‘고대 한일 뱃길 떼배 타고’)

거칠지만 제주인에게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제주바다의 한 가운데 초연히 서 있는 ‘고대해양탐험가’가 있다. 그는 배가 인류 문화의 이동에 쓰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바다에 목숨을 내던졌다. 떼배(테우)와 바람, 그리고 파도에 몸을 맡겨 거친 현해탄을 건넌 채바다 고대해양탐험가(78)에게 ‘제주인의 정신’을 물었다.

#탐험가를 꿈꿨던 성산포 소년

성산포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바다를 요람 삼아 자랐다.

수평선을 바라볼 때마다 그것을 넘고 싶었고, 떼배를 타고 바람 부는 대로, 물이 미는 대로 가고 싶었던 그는 ‘탐험가’를 꿈꿨다.

그래서 수산고를 졸업하고, 해병대에 입대했으며, 1980년대에 스쿠버다이빙까지 배웠지만 탐험가의 길을 걷진 못했다. 한양대에서 화학을 전공한 후 서울에 회사를 차려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바다 탐험’의 꿈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결국 사업을 접고 가족마저 서울에 남겨둔 채 마흔이 넘은 나이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보다 정확히는 고향의 바다로 되돌아왔다.

그는 “노르웨이 탐험가인 토르 하이엘달 박사가 롤모델이다. 그는 이집트문명이 잉카문명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탐험을 통해 증명했다”며 “문명의 이동은 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집트문명의 파피루스배와 잉카문명의 원시 통나무배에서 영감을 받아 제주의 테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떼배 타고 거친 바다 나서다

‘제주 최초의 인류는 어디서 왔을까?’. 그가 내린 답은 떼배였다. 

그는 “모든 문명은 강 유역에서 발원했다. 문명과 문화의 이동은 대륙에서 섬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동수단은 배”라며 “한반도에서 제주도로, 또 제주도에서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문화가 이동하면서 일본의 고대 문명이 만들어졌다는 게 내 결론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제주의 떼배”라고 피력했다.

우리나라가 일본 고대 문명의 기원이라는 것은 채씨만의 주장은 아니다.

실제 그는 해상문화의 이동을 탐구하면서 일본 학자들의 증언과 연구를 차곡차곡 모았다.

이노우에 미츠사다는 저서 ‘일본국가의 기원’을 통해 “백제 문화는 일본보다 일찍 발달했다. 일본은 백제 문화를 받아들였고, 백제 사람들의 힘에 의해서 일본은 발전했다”고 밝혔고, 에가미 나미오는 ‘기마민족 국가’에 “5세기 초부터 한반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일본에 건너와서 일본 왕실 국가에서 살게 됐다. 그들은 여러 가지 기능과 지식을 갖고 고대 일본의 경제, 문화 발전에 매우 큰 공헌을 했다”고 썼다.

이외에도 ‘고구려와 백제의 전신인 기마민족이 고대 일본을 점령했다’, ‘일본의 국보는 전부 조선 사람이 만들었다’, ‘일본은 한국과 똑같은 종족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그 책을 환무천황 시대 불태워버렸다’ 등 일본 학자들의 다양한 증언과 기록, 연구물을 수집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딱 한 가지, 바로 ‘증명’이었다. 제주에서 떼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그는 바다로 나섰고, 그렇게 고대해양탐험가가 됐다.

#목숨을 건 탐험 정신

채씨는 무려 세 번이나 바다를 건넜다.

1996년 5월 떼배를 타고 조상들의 방식 그대로 바람에 밀리고, 파도에 이끌리며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이듬해에도 역시 떼배에 몸을 실어 성산포에서 출발한 후 고토열도를 거쳐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탐험가로서 원시 그대로의 떼배에 올라 옛 방식 그대로 바다를 건넘으로써 연구가로서 수립한 가설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왕인박사는 5세기 초반 논어와 천자문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태자의 스승이 됐고, 일본 유학 발전에 기여했다.

채씨는 “왕인박사는 지금도 일본인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스승’이다. 왕인박사 역시 당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그가 항해했던 ‘백제 바닷길’을 떼배로 항해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2001년 2월 왕인박사의 고향인 영암군 대불항에서 떼배를 타고 출발해 진도 울돌목, 완도, 거문도를 거쳐 일본 사가현 가라쓰시에 도착했다.

그는 “떼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갈 때마다 폭풍을 만났다. 7m 높이의 파도를 뚫고 항해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탐험”이라며 “역사를 공부하고 과거의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적으로 접근해왔다. 그리고 이를 실제 증명하고 확인하는 게 바로 탐험이다. 무언가를 목숨을 걸고 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인류와 세계 아우르는 안목 가져야

일본으로의 항해는 2001년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주해안 일주, 제주~강진 고대 뱃길, 제주~진도 삼별초 뱃길 등 바다 탐험을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

그 때마다 몸과 함께 증명해야 할 역사적인 사실을 반드시 떼배에 태웠다.

그는 “삼성신화에 나오는 벽랑국을 대부분 일본이라고 알고 있다. 전남 완도군 소랑도가 바로 벽랑국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떼배에 올랐다”며 “삼별초 역시 제주에서 멸망하지 않고 일본 오키나와로 건너가 일본 유구 제국을 이뤘다. 이곳에는 지금도 제주 고유 방식의 돌담이 있고, 심지어 돔베고기식 요리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한 내 선택은 역시 항해였다”고 말했다.

그가 걸어온 고대해양탐험가의 길은 제주인 특유의 불굴의 정신 그 자체였다.

그는 “하멜은 미지의 나라였던 한국을 유럽에 알렸고, 그보다 앞서 제주를 거쳐 서울로 간 네덜란드인 박연은 평생을 우리나라 발전에 헌신했다. 이들은 우리를 도와줬지만 우리는 이 낯선 청년들의 희생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있다”며 “우리만 아우르는 게 아니라 인류를, 나아가 전 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이게 바로 제주가 평화의 섬으로 나아갈 수 있는 초석”이라고 강조했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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