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에 던진 무수한 질문들...한국 영화 발전 '앞장'
파도에 던진 무수한 질문들...한국 영화 발전 '앞장'
  • 김나영 기자
  • 승인 2021.12.0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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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제주인 10. 양윤호 영화감독
영감과 그리움의 땅 제주
경찰관 대신 영화의 길 선택
한국 영화계 스크린 장악
소재와 장르 등 멈추지 않는 도전
사진제공=양윤호 감독.

장차 한국영화의 성장과 맞물려 숱한 영화작품을 탄생시키게 될 제주 출신의 한 소년은 매립 이전의 탑동 바닷가 파도에 무수한 질문을 던졌다.

한림의 바다와 산, 모둠 벌초를 하러 갔다가 중산간에서 바라본 짙푸른 자연 또한 평생 간직할 추억이 됐다.

청년이 된 그는 영화감독의 꿈을 안고 바다를 건넜다.

1996년 첫 장편영화 ‘유리’로 칸에 진출한 뒤 한국영화 최초의 파이어 블록버스터 ‘리베라 메(2000)’와 전설적 인물인 ‘최배달’의 일대기를 다룬 ‘바람의 파이터(2004)’, 한국드라마 최초의 첩보액션 ‘아이리스’ 등 장르와 소재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으며 사랑받아 왔다.

현재는 우리나라 영화계 발전을 위해 5년째 춘사영화제를 주관해오고 있는 양윤호 (사)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이다.

#영감과 그리움의 땅 제주도

제주도의 자연, 어머니, 역사적 한은 양 감독에게 숱한 영감과 끈기를 줬다.

매립 이전의 탑동 바닷가는 고교시절 양 감독이 무수한 질문을 던졌던 곳이며, 한림에서 모둠 벌초를 위해 찾은 중산간에서 바라본 짙푸른 풀잎과 파란 하늘, 오름, 동굴은 무수한 창작의 원천이 됐다.

제주가 그리움의 대상이 된 건 항상 “제주 일을 돌봐야 한다”고 귀에 박히도록 말하는 어머니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양 감독은 강조했다.

양 감독은 영화를 제작해 온 원동력 중의 하나로 제주인의 유전자 깊이 박힌 어쩔 수 없는 한을 꼽기도 했다.

4‧3과 더불어 그동안 억울함의 역사를 안고 살아온 제주인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양 감독은 “기억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지금에 와서는 어느 정도 잊혀진 감성이지만 제 세대까지는 유전자 깊이 박힌, 어쩔 수 없는 제주사람으로서 상속물인 셈”이라고 말했다.

양 감독은 영화 창작 작업에도 제주에 대한 애정을 빼놓지 않았다.

아이리스에서 배우 김태희(승희 역)에게 ‘제주 감귤 출하 철이라 감귤 홍보 겸 귤 좀 많이 먹어다오’했다가 드라마 속 배역이 임신했다는 어마한 오해를 받은 적도 있고, 제주신화를 3D 영상으로 찍기 위해 자연의 명소를 다닌 기억도 있다.

양 감독은 “제주인의 삶을 3세대에 걸쳐 작품으로 제작하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주인 드라마나 영화를 촬영하게 될 거란 생각은 항상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덧붙여 양 감독은 현재는 매립 후 옛 모습이 사라진 탑동 바닷가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력 하기도 했다. 
 
#경찰관 대신 택한 영화의 꿈

제주제일고 학생회장 출신이었던 양 감독은 영화감독이 아닌 경찰이 될 뻔했다. 어머니 권유로 경찰대학 시험을 봐 1, 2차를 합격하면서 그는 인생의 큰 기로에 놓였다.

양 감독은 처음으로 꿈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했고 어머니와 많은 어른들의 바람대로 경찰의 길을 택하는 게 아닌 하고 싶은 일인 영화감독의 길을 택했다.

양 감독은 “당시 제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주뿐 아니라 서울서도 영화를 한다는 것은 ‘딴따라’나 하는 짓이라고 다소 비하적인 느낌을 가질 때였다. 이에 많은 동문들과 친구, 어른들이 염려 했다”며 “전 제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무식하게 그 길을 택했는데, 다행히 한국영화가 저와 더불어 성장해줬다. 호기심 많은 성격 탓에 드라마랑 그 외 뉴미디어 작품도 많이 도전했다. 정말 다행인 건, 어려운 점은 많았지만 그래도 그 선택을 후회한 적 없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입학 후 인연은 스승이자 그에게 있어 ‘영화의 아버지’였던 유현목 영화감독이 가장 컸다. 아울러 배우 김혜수와 박신양 등 많은 선후배를 만났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 배우 박신양을 제주로 데려 가 습작을 촬영하기도 했고, 입대 전 도내에서 브레히트 연극 ‘사천의 선인’을 준비해 1회 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장르와 소재 멈추지 않는 도전…원동력은 호기심
양 감독의 첫 영화는 동국대 연극영화과 재학시절 제작한 ‘가변차선(1992)’라는 작품이었다.

가변차선은 현재 없어졌지만 당시 서울에서 전 차선이 차로 막힐 때, 막히는 차선 하나의 방향을 상행 혹은 하행으로 변경해 꽉 막힌 도로의 숨통을 틔워주는 교통규칙 중 하나였다.

작품은 ‘그런 가변차선이 왜 우리 인생엔 없나?’라는 질문을 비유적으로 던졌다.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면서도 광주의 한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상황 하에서 나온 영화로 단편영화 대상을 모조리 휩쓸었다.

이후 그는 장편 영화 데뷔작 ‘유리(1996)’로 칸 영화제에 진출하면서 반향을 일으켰다.

유리의 칸 영화제 진출은 한국 영화로서는 세 번째다.

양 감독은 “다행히 현재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생기고 교류가 많아지면서 이제 한국영화의 칸 영화제 진출 문턱이 많이 낮아졌는데, 당시로서는 희귀한 경우였다”며 “그럼에도 막상 가서 보고 느낀 건 ‘한국영화 가능성이 많다’였다. 한국 영화인들은 충분히 이 허들을 넘을 수 있다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양 감독은 ‘유리’ 이후에도 ‘리베라 메(2000)’와 ‘바람의 파이터(2004)’, ‘아이리스’ 등 장르와 소재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양 감독은 “새로운 기술이나 작품, 이야기, 분야에 호기심이 많았다”며 “‘아이리스’가 끝나고 KBS 당시 부사장이, ‘영화감독이 드라마로 와서 다 실패했는데 당신이 성공한 이유가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호기심이었던 것 같다. 드라마는 영화가 다르다고 인식하고, 처음 바닥부터 드라마의 요소적 체계를 다시 배워 그 시스템에 영화적 시스템을 융합시킨 게 성공요인이 아니었을까 결론 내린 적 있다”고 회상했다.

양 감독은 현재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을 맡으며 5년 째 춘사영화제를 주관해오고 있다. 어느덧 영화제는 올해 처음으로 춘사 국제영화제로 국제 타이틀을 걸었다.

양 감독은 “변화하는 영화의 정의에 맞춘 행보를 같이해 앞으로도 새롭고 좋은 영화와 영화인 탄생을 위해 영양분을 주고 길러낼 것”이라고 밝혔다.
 
#미래의 새싹들에게 “무소의 뿔처럼 가라”
양 감독은 영화 새싹들에게 “시행착오 속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건 아주 중요하다”며 “내가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어 하는 경험이나 공부라면 그 어떤 것도 좋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영화라고 알고 정했다면 더 이상 자신을 의심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가면 된다”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양 감독은 영화감독을 도민들에게 “문화가 돈이 되고 국가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저희가 살고 있고 예술이 점점 생활이 돼가고 있다. 많은 제주인들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아끼고 계시다. 우리 제주 문화와 예술, 영상을 더 아껴주시고 제주의 경쟁력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관심을 더 가져주셨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김나영 기자  kny8069@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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