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간 조선 전마 도맡은 ‘헌마공신’ 김만일과 후손 자취 남아
300년간 조선 전마 도맡은 ‘헌마공신’ 김만일과 후손 자취 남아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11.29 19: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8. 쫄븐 갑마장길(2)

‘따라비’ 오름명 유래 궁금증…해석 분분
가을 늦게 핀 물매화, 김순이 시인 떠올라
무덤 앞 동자석 눈길, 김만일 후손 묘 추정
대대손손 목축·헌마 진력, 국난 극복 공헌
따라비오름.
따라비오름.

■ 따라비 오름에서
‘따라비’에 오를 때마다 그 이름이 어디서 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도진다. 하기야 이 세상 만물이 이름을 가질 때 다 고만고만한 사연을 갖고 태어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름’을 가지고 15년간 강좌를 하고 있는 필자가 그걸 알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자꾸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속 시원히 대답을 못해서다.
지금 제주의 오름이 도합 368개라고 한다든지, 오름 이름의 전범(典範)으로 삼을 만한 건 아무래도 1997년 12월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발간한 ‘제주의 오름’이다. 이 책에는 이 오름 이름이 ‘따라비오름’이 아니라 그냥 ‘따라비’다. 그러면서 뒤에 ‘오름명의 유래, 어학적 해석’이라고 장황하게 주석을 달았다.
①오름 동쪽에 모지오름이 이웃해 있어 마치 지아비, 지어미가 서로 따르는 모양이라서, ②오름 가까이에 모지오름, 장자오름, 새끼오름 들이 모여 있어서 가장격이라 하여 ‘따애비’라 불리던 것이 ‘따래비’로 와전된 것(가시리지, 1988), ③이 오름 동쪽의 모지오름과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형국이라 하여 ‘땅 하래비’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④고구려어에 어원을 둔 ‘다라비’가 원이름으로, ‘다라’는 고구려어 ‘달을(達乙)’에서 온 것으로 ‘높다’는 뜻이고, ‘비’는 원래 ‘미(山)’로 ‘높은 산’이 된다고 한다. 또 이 ‘다라비’가 경음화해서 ‘지조악(地祖岳)’이라는 표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기엔 낯이 뜨겁다. 오창명 박사도 그의 ‘제주도 오름과 마을 이름(1998)’에서 ‘논의해야 할 과제로 남겨둔다’고 했을 정도다.

따라비오름.
따라비오름.

■ 물매화를 바라보며
11월 중순의 따라비에는 가을꽃들이 다 시들어가는데, 상대적으로 늦게 피는 ‘물매화’만 또랑또랑하게 등반객을 맞는다. 그래도 억새풀을 의지하여 쑥부쟁이, 미역취, 자주쓴풀, 당잔대 같은 들꽃이 그런대로 살아남아 옛 추억을 불러들이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그들을 일별하노라면 필자가 오름 모임에서 처음으로 이 따라비에 오를 때 나에게 들려주었던 김순이 시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시인은 꽃이 지천인 이 오름을 오르면서 혹 꽃들을 밟을까봐 까치발로 걸었다는….’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 시인이 혹시 자기 자신은 아니었을까.
‘물가에 돋아난 풀처럼/ 늘 발이 젖어/ 시린 가슴 한 모퉁이/ 거기에 의자 하나를 놓는다/ 떨고 있는 마음아/ 거기에 몸을 기대렴/ 초원의 의자에 앉아/ 마른 풀잎이 부르는/ 바람의 노래를 들으렴// 외로울 때마다 떠오르는/ 초원의 의자/ 그리고 하얀 물매화’  -김순이 ‘초원의 의자’ 전문

물매화.
물매화.

■ 북봉우리 무덤의 동자석
쫄븐 갑마장길의 표시를 따라 따라비오름 능선과 지름길을 지나 북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알오름처럼 생긴 봉우리에 무덤이 하나 있다. 잠시 물이나 마시고 쉬어갈까 하는데, 오늘따라 무덤의 동자석이 아는 체를 한다. 들어가 가만히 쓰다듬으며 살피니 너무 투박한 모습이다. 돌도 우리가 흔히 보는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이 아니고 미끈해서 얼굴이 미륵처럼 보인다.
제주에서 흔히 보이는 무덤의 ‘동자석(童子石)’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내아이의 형상을 새겨서 무덤 앞에 마주보게 세우는 돌’이라 나와 있다. 세우는 목적은 무덤에 외로이 누워 있는 돌아가신 이(亡者)를 위로하는 것인데, 앞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주전자나 술병, 술잔, 부채, 홀, 창, 꽃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 동자석은 무엇을 들고 있는지 뚜렷하지 않다. 그리고 코만 커다랗게 새긴 얼굴은 그런대로 윤곽이 뚜렷한데, 다른 것은 거의 생략하다가 미안했는지 뒤에 땋은 머리를 양각했다.
얼핏 오래된 비 앞면을 보니 ‘선략장군(宣略將軍) 행감목관(行監牧官) 유향좌수(留鄕座首) 김공지묘(金公之墓)’라 되어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헌마공신(獻馬功臣)인 김만일(金萬鎰)의 후손일 터. 비석을 살펴 김만일의 9세손이라는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돌이끼가 돋고 난삽하게 되어 있어 그냥은 쉽게 읽어내기가 힘들다.

동자석.
동자석.

■ 헌마공신 김만일.

헌마공신 김만일.
헌마공신 김만일.

조선 선조 때의 헌마공신 김만일(金萬鎰)은 본관이 경주로 지금의 남원면 의귀리 사람이다. 일찍부터 말을 길러 소유한 말이 1000필이 넘었다고 한다. 헌마공신 김만일 기념관의 자료에 따르면, ‘탁월한 목축기술과 위기 극복 능력으로 임진왜란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수천 필의 전마(戰馬) 등을 도맡아 감당해내며, 국난 극복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고 나온다.
김만일은 1594년, 1612년, 1618년, 1620년 등 네 차례나 전마(戰馬)를 바쳐 광해 임금이 직접 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정2품)에 임명했다. 1922년에 각별히 키운 말을 임금께 올려 보냈고, 1624년부터 5년간 양마 1300여 필을 헌마한 공로로 1928년 종1품 숭정대부에 제수되어, 헌마공신으로 이름이 높다. 이후 김만일 후손들은 230여 년 동안(1659~1895) 제주산마 감목관(83명, 종6품 현감과 동급)직을 맡아 산마장을 운영하면서 어승마(御乘馬)와 전마는 물론 양마 산출에 진력함으로써 국가 전마의 공급처로서의 기능을 다했다. 김만일이 준마를 길러 나라에 처음 헌마한 때부터 무려 300년가량 한 집안에서 국방의 기초가 됐던 전마를 도맡아 감당했던 셈이다.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2020년 5월 5일에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 919번지에 부지면적 4450㎡, 건축면적 886.5㎡의 기념관을 완공하고, 제주특별자치도의 수탁을 받아 의귀리마을회에서 운영 중이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지난 47회의 기사 중 ‘산마장(産馬場)’을 ‘산마장(山馬場)’으로 바로 잡습니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