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가장 안쪽
세상의 가장 안쪽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11.02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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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잠시 잠깐 뻐꾸기 울음을 멈춘 사이
삼백 평 과수원에
삼천 평 노을이 왔다
넘치는 감귤꽃 향기 더는 감당 못 하겠다

이렇게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하는 시간
하루일상 시시콜콜 어머니 전화가 온다
말끝에 작별인사를 유언이듯 하신다

어제는 방석 안에 오늘은 속곳 속에
당신의 장례비를
꽁꽁 숨겨두었단다
치매 기 언뜩 스며든
세상의 가장 안쪽
- 시조시인 김영순의 ‘가장 안쪽’ 전문 -

탐라문화제기간에 산지천갤러리에서 문인협회 회원들의 시화전이 열렸다. 작품마다에 오롯이 담긴 사연들을 읽다가 한참을 읽고 또 읽게 되는 시 한 편, 아마도 나 또한 예외는 아닐 거란 생각에 깊이 공감하며 머물러 읽지 않았나 싶다. 

얼마 전 육지에 볼일이 있어서 용인에 터를 잡은 친구 집에서 이틀 밤을 보내었다. 주간보호센터에 다녀와서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는 친구의 시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아무런 대꾸가 없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며느리 단짝이라며, 고향까마귀라며 반가이 맞아주던 분이셨는데 재작년에 와서 인사를 드렸을 때에는 “나 알아져?” 하셨다. 서서히 머릿속의 기억들이 하얗게 지워지는 과정을 보는 듯해 가슴이 아파왔다.

친구에게 치매가 든 시어머니를 집에서 모시는 게 힘들지 않냐고 조심스레 물었더니, 그래도 우리 어머니는 며느리 힘들지 않게 ‘착한치매’를 앓고 있다며 환한 음성으로 답변한다. 시집와서 마음 상하고 눈물 흘린 날들도 있었지만, 남편도 없이 자식들 키우며 살림을 살아 온 시어머니의 삶을 돌아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고 한다.

남편과 시누들이 요양원 이야기를 꺼내면 친구는 되레 화를 낸다고….

식탁에 마주 앉아 시어머니 밥숟가락에 반찬을 얹어주는 모습을 보며 치매 앞에 자유로울 수 없는 나를 가늠해 본다.

다행히 친정어머니는 팔십 중반을 넘었지만 나보단 더 기억력이 좋다. 매사에 오지랖 넓게 간섭을 하시는데, 때로는 총기가 좋은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티격태격하며 지낸다고 했더니, 친구는 복에 겨워 철없는 소리 한다며 웃는다.

세상의 가장 안쪽, 친구네 집 베란다에 물봉선이 소담하게 피었다. 가을날 보라색을 띠어서일까? 슬픈 듯 어여쁘다. 여자 셋이 같은 장소에 앉아 시간을 햇살에 흘려보내며 물봉선을 바라본다. 날이 좋아서일까? 무표정했던 얼굴에 설핏 햇살이 어린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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