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후의 수행시간
인생 최후의 수행시간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10.1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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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영 수필가

최근에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떠올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2, 3년 전만 해도 노력을 했는데 요즘엔 그것이 귀찮다. 그런 얘길 했더니 에너지 고갈이라고 주위에서 걱정을 한다. 치매가 올지 모른다고.

사실 잊고 있는 것도 있지만 애초부터 기억하지 않은 것도 있다. ‘어제 먹은 중국요리 맛있더라’ ‘그 식당 이름이 뭐였지?’하고 물으면 그 식당 이름을 잊어버린 게 아니라 처음부터 간판도 안 보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맛있었다. 그런 것이다. 잊어버린 게 아니고.

가끔 노후설계에 대해서 물어올 때가 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인생 50년 시대에는 여생에 대한 계획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인생 100년의 시대에 여생은 없다. 하루하루 살아가야 한다.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현대의학은 인간을 물건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건강에 대해서 별 애착을 갖지 않게 된 것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이다. 물건이니까 간단히 자르고 도려내고 관을 집어넣고. 그것을 의학의 진보라고 한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에 의해 수명이 연장되는 은혜를 우리는 받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물건이 아닌 이상 천차만별의 마음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은 병을 고치고 싶은 마음에 물건 취급당하는 걸 수용한다. 그러나 그 중에는 나무람을 당하고 고통스러워도 물건이 될 수 없는 인간도 없다. 현대의학에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데이터이다. 그때부터 나는 약을 거부하게 되었다. 나 같은 골치 아픈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현대의학에 기댈 자격이 없다. 

최근에는 식성도 변했다. 전에 좋아서 먹던 음식이 맛이 없어졌다. 젊은이들이 즐겨 먹는 케잌도 서슴없이 먹는다. 단 것은 몸에 안 좋다는 조언을 뿌리치고. 주말에 드라이브 나가서 예쁜 찻집에서 먹는 커피와 케잌이 나의 힐링 식품이다.

아무리 신경을 써도 죽을 땐 죽는다. 예전의 노인은 ‘언제까지라도 건강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노후를’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죽음을 수용하는 심경이었다.

지금은 많은 노인이 노후를 즐겁게 보내고 싶은 바람과 가족에게 폐 끼치지 않고 죽고 싶다는 마음에 조바심을 낸다.

가족주의 속에서 노인이 존경받고 소중히 여기는 시대는 지났다. 희생을 악덕처럼 생각하는 지금은 노인은 눈치를 보며 폐 끼치는 걸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앞으로 노인이 더 노인의 고독에 견디며 육체의 나약함과 병의 고통에 견뎌야 하고 쉽게 두지 않는 현대의학에도 견뎌야 한다.

가족에게 폐를 끼치게 될 한심함. 미안함을 견뎌야 하고 그 모든 것을 원망할 수없고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노년은 인생 최후의 수행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잘 시들어 있는 그대로의 운명을 받아들일까. 즐거운 노후 같은 걸 추구할 여유가 나에게는 없다.

신이여 바라옵건대 야만인으로 살아온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잠깐의 시간을 주시옵소서. 절실하게 ‘아 이것이 인생이었나’를 중얼거릴 시간을.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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