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절’
‘아름다운 시절’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21.10.1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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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 같이 힘든 날도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시절’이 된다. 아름다움이란 그 대상의 아름다움 자체보다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의 아름다움’에서 피어나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 때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다.

11월 초부터 방역체계를 ‘단계적 일상회복’ 체계로 전환하고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을 되찾기 위한 첫 발을 내딛는다. 지난해 1월 20일 코로나19 첫 환자가 발생한 지 1년 9개월여 만에 ‘위드(with) 코로나’로 간다.

코로나19는 우리를 힘들게 했다. 이 힘들었던 일들도 지나고 나면 아름다워질까. 각자의 생각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나는 성급하게도 지난 1년 9개월을 돌아보며 ‘아름다운 시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벨르 에뽀끄’(Belle Epoque)는 불어로 ‘아름다운 시절’을 뜻한다. 미국의 사학자 매리 매콜리프는 책 ‘라 벨르 에뽀끄’(La Belle Epoche)에서 1871년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평화로운 시기를 이렇게 말했다.

이 전환기에 교통과 통신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사람들은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적 삶을 향유했다. 백화점에서 다양한 물건들을 구입하고 바캉스 문화도 생겨나 여행을 하고 사진과 영화를 통해 추억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고 그 시대가 아름다웠던 것도 아니다. 빈부 격차는 더 심해졌고 예술을 향유한 상류층은 한량이었으며 사랑은 으레 불륜이었다.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인식은 이렇게 양극단이다. 역사(歷史)에서는 ‘아름다운 시절’이 항상 승자의 관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일상을 바꿔 놓았다. 비(非)대면은 조금 심하게 말해서 남에게 줄 생각도 받을 생각도 없게 했다. 그러다 보니 옆집 아이가 어느 대학에 들어갔고, 그 집 아들이 무슨 직장에 다니는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다.

남에게 신경을 덜 쓰다 보니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어 스트레스도 덜 받았다. 남에게 신경을 쓰는 대신 자신의 삶에 더 집중하는 기회가 됐다.

우리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많은 이유가 ‘남과의 비교’나 ‘남의 시선’인 점을 감안하면 ‘비대면’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한다. 오히려 행복하다는 사람들도 꽤 많다.

그동안 지나치게 남에게 관심을 갖고 참견했다. 각자 성장 환경도 다르고 인생 목표나 삶의 방식도 다양한데 비슷한 생활 방식만을 고집했다. 그리고 옳고 그름의 기준도 획일화했다는 성찰이다.

사회적 민감성(reward dependence)이 높은 우리가 ‘남에게 신경을 덜 쓰고 자신에게 신경’을 써본 코로나19 시대다. 그래서 후일, 이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최근 직장에서 승진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승진하면 신경 쓸 일이 더 많아진다는 이유이다.

또 이런 말을 기억하란다. “들고 갈 거여, 지고 갈 거여, 땅 속으로 갈 때에는 다 내 키만 한 관짝 밖에 없는 것이여.”

그래. 인생은 사는 날까지 그냥 사는 것이지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문제가 아니다. ‘역사가 승자의 관점’이라지만 인생도 그러하리라 생각하는 건 난센스. 영원히 살 것 같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다.

누구나 아름다운 시절이 있겠지만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심히 허리를 휘도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붉은 노을을 바라볼 때, 사랑하는 사람의 피부 감촉과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아름다운 시절’이 아닐까.

그건 어떤 승패(勝敗)와도 관련 없는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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