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임금이라 부르리다
광해임금이라 부르리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9.26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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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질토래비 이사장

광해군이 서거한 날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다. 제주 선인들은 이즈음 내리는 비를 광해우라 칭하곤 ‘칠월이라 초하룻날, 임금 대왕 붕어하신 날, 가물당도 비 오람서라, 이여이여’하고 노래하며 광해의 넋을 달랬다.

선인들도 호칭한 대왕 광해를 어째서 역사는 광해군이라 칭하는가? 묘호를 얻지 못 해 종묘에 들지 못 해서? 인조반정으로 광해를 떠받치던 북인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서? 이것도 아니면?

광해군 일기에 실린 폐위 죄목에는 형 임해군과 아우 영창대군를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가둔 것, 토목공사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위태롭게 한 것, 그리고 다음 내용도 들어있다.

‘중국을 섬긴 지 200여 년, 왜란 때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도다. 선왕인 선조는 어위하신 지 40년 동안 지성으로 사대하여 평생 등을 서쪽(중국 쪽)으로 대고 앉으신 적이 없도다.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이는 광해가 명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다 사대파에 밀려났다는 말이 아닌가. 

15대 임금 광해가 회환 위기를 모면한 반면 14대 선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당했다. 특히 명에 사대하고 청을 배척했던 16대 인조는 즉위 초 이괄의 난을 시작으로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하여 형제의 맹약을,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군신관계를 맺어야 했다. 또한 숙부 인성군과 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를 죽였고 인성군의 처자식들과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제주에 유배시켰다.

반면 광해는 임진왜란 시 세자가 되어 분조를 이끌고 전쟁터를 누비며 관민들에게 분전할 것을 촉구하고 명군 지원업무 등을 총괄했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광해는 불타버린 경복궁 등을 새로 지었고 포도청 상시 설치와 대동법 실시 등으로 민생을 구제하려 했다. 선조실록과 허준의 동의보감 등을 간행했으며 국교를 재개하여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을 귀국케 했으며 조총과 장검 등을 수입하여 후금의 침략에 대비했다. 그러나 왕권 강화를 명목으로 인목대비를 폐위하라는 대북파의 집요함에 광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이여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다지도 혹독한 형벌을 내린단 말인가. 차라리 인간세상을 벗어나 바닷가에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구나.’ 이 말이 씨가 되었는지 광해는 강화도·태안반도·교동도를 거쳐 제주도에서 1641년 7월 1일 서성(西城) 진서루 근처 위리안치 된 곳에서 한 서린 삶을 마감했다. 광해가 숨을 거두자 임금에 대한 예를 표해야 한다는 제주 선인들의 애원을 이시방 목사가 조정에 전달하여 왕자에 준하는 장례가 관덕정에서 치러졌다. 

광해왕의 흔적은 중앙로 서쪽 길가에 위치한 ‘광해군 적소터’ 표지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1653년 제주섬에 표착한 하멜은 표류기에서 생존자 30여 명이 거주했던 곳은 서성 안 임금 숙부(광해)의 적소였다고,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에도 ‘(안치소는) 제주목 서성 안에 있다. 정축년(1637년) 6월 6일 어등개(구좌읍 행원리)에 정박하고 다음 날 제주성에 들어와 위리되어 30명이 윤번으로 지켰다’라고 쓰여 있다. 이로 본다면 광해의 적소터는 관덕정 서남쪽 근처가 유력해 보인다. 

지난 6월 ㈔질토래비는 제주대 경영대학원 문예경영학과, 도시재생지원센터와 업무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른 소모임 주제인 ‘빛의 바다를 건너온 광해를 테마로 다양한 사업 발굴’의 하나로 필자는 광해군을 광해임금으로 부르기를 제안하였다. 중국에 사대하던 조선왕조는 무너졌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대한민국은 세계로 웅비 중이다. 본질적이고 사실적 가치가 역사의 판단 기준이 되는 시대를 우리는 맞고 있음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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