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정(情)을 생각하며
제주의 정(情)을 생각하며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9.13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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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건 문학박사

최근에 아이들과 관련된 사건·사고들이 많아지고 있다. 단순한 실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더 나아가 생존권을 고의적으로 훼손하는 사건들이라서 우리 사회의 윤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진 것은 아닌지 심각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동방예의지국으로 이름난 우리나라가 어떻게 이런 지경으로까지 무너져 내린 것인지 참담할 뿐이다. 아이들을 보호하고 격려해 줘야 할 기초단위인 가족 윤리와 사회 윤리가 무너진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한 명의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그 가족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힘을 보태야 한다는 격언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그 말 그대로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족의 보호와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 이모 등 모든 가족 구성원이 골고루 돌아가며 돌봐주기 때문에 사회성은 저절로 길러질 수밖에 없었고 사촌이나 형제들과 어울려 지내다 보면 남모를 고민으로 괴로워할 겨를도 없었다. 거기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삼춘’이나 ‘권당’ 사이이기 때문에 마을 아이들을 서로 챙겨주고 보살펴주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다른 지역도 우리와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지만, 특히 우리 제주도에서만 유난히 두드러지는 정(情)의 문화가 있다. 섬이라는 지형학적 특징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주도민이 그동안 겪어온 역사적 고난이 많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고난의 시간을 보내면서 ‘혼자보다는 여럿이 서로 배려하고 보살피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생존에 유익하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터득했던 것이 아닐까.

필자의 아버지는 4·3사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거의 고아처럼 사셨다고 한다. 그래도 목숨을 부지하고 남들처럼 살 수 있었던 것은 마을 삼춘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이었단다. 당신들 식사 자리에 불러서 밥 한 그릇 나눠주고 당신들 자식들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줬기 때문에 어려운 시절을 잘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문화적 유전자가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배어 있다. 심지어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말썽을 일으킬라치면 ‘너 누구 아들이지’ 혹은 ‘너 누구 조카지’라거나 ‘너 어느 동네 살지’하는 말을 먼저 듣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나’ 하나의 행동이 ‘나’나 ‘가족’의 명예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의 명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되고 스스로 조심스러워진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때 마을 사람들이 나에게 베풀어주었던 것들이 새록새록 기억난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데 먹을 것 하나라도 챙겨주고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 주었었다. 그분들이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그분의 후손들을 보면 ‘내가 받은 만큼 그 후손들에게라도 보답해줘야지’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제주도만의 ‘정’이라는 것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라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가 되었다. 우스갯소리로 ‘사람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라’가 유행이 되고 있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슬’이라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 보면 ‘일본 앞잡이가 되어서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던 마을 사람’을 용서해 주는 장면이 나온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평생 원수가 되어서 마을에서 쫓아낼 법도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같이 어울려 살면서 서로의 아픔을 같이 치유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출생률이 계속 낮아지고 있고 심지어 지방 소멸이 예상되는 곳도 많아지고 있는 요즘,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다. 요즘처럼 흉흉한 시대에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모범 사례를 제주도의 ‘정(情)’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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