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얻은 자, 이 곳에서 첫 가르침을 전하다
깨달음을 얻은 자, 이 곳에서 첫 가르침을 전하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8.26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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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는 북인도를 가다(6)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으로 설법을 펼친 곳으로 알려진 사르나트. 융성했던 불교문화는 힌두교의 득세와 이슬람의 침입 등으로 파괴돼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거대한 탑인 다메크 스투파만이 살아남아 그 옛날의 영화를 대변해주는 듯하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으로 설법을 펼친 곳으로 알려진 사르나트. 융성했던 불교문화는 힌두교의 득세와 이슬람의 침입 등으로 파괴돼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거대한 탑인 다메크 스투파만이 살아남아 그 옛날의 영화를 대변해주는 듯하다.

■ 부처의 첫 설법지 ‘사르나트’
인도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교가 있다고 합니다. ‘갠지스 강 모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는 말이 있듯,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희한한 종교들이 많다고 합니다. 코끼리나 원숭이 등 동물을 신으로 모시는 건 이미 알려졌지만 쥐를 모시는 신앙이 있을 정도입니다.

언젠가 부처의 탄생지가 인도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네팔 룸비니 동산이었다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불교의 4대 성지는 부처가 태어난 ‘룸비니’(네팔),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인도), 처음 설법을 펼친 ‘사르나트’(인도), 열반에 든 ‘쿠시나가르’(인도)입니다. 이 4대 성지 가운데 사르나트가 바라나시에서 약 10㎞ 떨어진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안내서를 보고 그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함께 수행했던 다섯 명의 도반(道伴)을 만나 자신의 지혜를 나눠주려고 갠지스 강에서 13㎞ 떨어진 곳에 있는 숲 사르나트를 찾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과거 부처가 수지타라는 소녀에게서 우유죽 공양을 받은 뒤 고행을 포기하는 것을 보고 그를 변절자라고 여겨 떠났답니다. 고행만이 깨달음의 전부가 아닌 것을 알게 된 부처는 자신의 깨달음을 나누기 위해 그들을 찾아 나서게 된 것입니다.  

다섯 도반은 멀리서 부처가 오는 것을 보면서 변절자를 상대하지 말자고 서로 약속했지만 깨달은 자의 위엄이 대단했던지 그가 가까이 오자 자신들도 모르게 일어나 자리를 청했답니다. 이후 부처는 이곳 사르나트에서 그의 첫 설법인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다섯 도반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불교가 인도 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사르나트는 불교 예술의 중심지로 크게 발달했고 기원전 3세기 불교에 귀의한 아소카 왕이 칙령을 새긴 기둥(아소카 석주)과 사리탑, 수도원 등을 세웠다고 합니다.

640년 이 곳을 방문한 현장법사(玄奘法師)는 100m 높이의 사리탑과 웅장한 승원에 1500여 명의 승려들이 살고 있다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사르나트는 불교가 강성했던 시기에는 절대 성지 중 하나로 추앙받았지만 힌두교의 득세, 이슬람의 침입으로 주요 건물이 파괴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한때 1500여 명의 승려가 살았다고 알려진 웅장한 승원 터 유적.
한때 1500여 명의 승려가 살았다고 알려진 웅장한 승원 터 유적.

■ 거대한 다메크 스투파, 옛 영화를 대변
현재 인도에는 불교도가 인구의 1% 정도뿐이라 그런지 사르나트는 인도 사람보다는 외국에서 온 불교도들을 위한 성지가 되고 있답니다. 바라나시에서 힌두교도들이 북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온 터라 그런지 이 곳 사르나트는 쓸쓸하다고 표현해야 할 만큼 조용합니다.

마치 산중 절을 찾은 기분이랄까, 어디를 가든 사람들로 꽉 차 있는 인도에서 이렇게 조용한 곳이 있다니…. 마음껏 크게 숨을 내쉴 수 있어 좋습니다. 

입구에 들어서자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 흔적들이 거대합니다. 1835년 영국 왕립 고고학회가 사르나트 유적지를 처음 발굴했는데 이때 아소카 석주 상단에서 분리한 네 마리의 사자상은 인도의 국보인 국장(國章)으로 채택됐고, 초전법륜상(初轉法輪象)은 콜카타 인도박물관에 전시됐다고 합니다.

유적 대부분이 파괴돼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고 유적군 안쪽에 있는 다마라지카 스투파(Dharmarajika Stupa)는 부처가 처음으로 설법을 한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졌습니다. 이 탑 역시 여섯 번의 보완공사를 거쳐 30m 높이 규모로 확장됐으나 1794년 바라나시 마하라자가 자신의 궁을 지을 벽돌을 구하기 위해 헐어버려 현재는 기단 부분만 남았습니다. 거대한 탑인 다메크 스투파(Dhamekh Stupa)만이 살아남아 그 옛날의 영화를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유적지 주변에는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한국, 중국, 일본 등 불교도가 많은 나라의 사찰과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 있다기에 관람하고 싶은데 밤 열차로 다시 장소를 옮겨야 해 유적지만 돌아보고 떠나야 한답니다.

한때 1500여 명의 승려가 살았다는 유적군은 거대했으나 현재는 기단의 붉은 벽돌들만 남았습니다. 지금의 사르나트는 바라나시에서 지친 여행자들에게 훌륭한 휴식처,로 현지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애용되거나 소풍 나온 가족들이 나무 그늘에서 놀고 있는 모습뿐입니다. <계속>
<서재철 본사 객원 大기자>

동남아 각 지역의 승려와 불교도들이 유적지를 둘러보고 있다.
동남아 각 지역의 승려와 불교도들이 유적지를 둘러보고 있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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