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시인 김남주
옥중시인 김남주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8.24 19: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관후 시인·작가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진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 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녁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1989년 출간된 시집 ‘사랑의 무기’에 수록된 김남주의 ‘노래’는 반외세, 반봉건을 주장했던 동학농민운동이 모티브이다. 이 시에 화가 김경주가 곡을 붙였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멤버 문진오가 노래로 불렀다. 이후에 안치환이 부르면서 동학농민군은 대나무로 죽창을 만들어 평등을 외쳤다 하여 ‘죽창가’(竹槍歌)라 했다.

시인의 정체성은 ‘노래’하고 ‘쓰는 사람’이다. 시인 김남주는 9년 3개월 동안 영어의 몸이었다. 그는 은박지에 칫솔을 날카롭게 갈아 시를 쓰고, ‘뺑끼통’의 흐늘흐늘한 화장지에도 시를 썼다. 470여 편의 시 가운데 감옥에서 쓴 것이 300여 편이다. 그래서 그를 ‘옥중시인’이라 부른다.

‘두메’, ‘산골’, ‘들판’이 ‘녹두꽃’, ‘파랑새’, ‘들불’이 되자 한다. ‘두메’, ‘산골’, ‘들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이 그토록 되고자 했던 ‘녹두꽃’, ‘파랑새’, ‘들불’이 무얼 말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배고픔을 넘어 외세에 대항하며 자유, 희망 나아가 주권을 외치지 않았겠는가.

물론 동학농민운동 당시 ‘죽창가’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가사를 보면 녹두꽃, 파랑새, 들불이 되자 한다며 봉건주의, 일본군에 맞서 자유, 주권 등을 희망한다.

마지막 가사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에서 모든 민중이 반란에 동참하고자 함을, 그리고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에서 죽창이 되고자 함을 노래하고 있다.

‘죽창가’는 바로 살아 있는 노래가 되어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맞서 대학생들이 함께 부르며 저항했다. 3·1절 특별드라마였던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 나오기도 했다. 안치환이 부른 ‘녹두꽃’이 드라마에 삽입되어 비장미를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죽창가’가 곡괭이와 몽둥이, 그리고 죽창만 들고 있던 동학농민군이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학살당한 우금치 들판에서 한 서린 농민군들의 넋을 기리는 노래라는 사실만 알면 된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어느 예비후보가 “외교는 실용주의, 실사구시, 현실주의에 입각해야 하는데 이념 편향적 죽창가를 부르다가 여기까지 왔다”고 말해 때아닌 ‘죽창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문제는 “이념 편향적 죽창가”란 그의 발언이다. 하긴 보수 기득권층에서 듣자면 좀 껄끄러운 노래일 수는 있으리라.

한국과 일본의 현 대립을 마치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 대립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지방 수령의 수탈, 그리고 일제에 항거한 민중들의 의지를 담은 ‘죽창가’를 마치 ‘이념 편향’의 노래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과 일본의 무역 갈등과 ‘죽창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다른 문제는 ‘죽창가’를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민중들이 부른 노래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하고 정부와 맺은 ‘전주화약’(全州和約) 이후 시작된 지역 민요에 가사를 붙여서 만든 노래’라고 역사적 배경까지 들먹이며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그런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선 밝혀야 할 것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우리 민중들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죽창가’를 부르지 않았다. ‘죽창가’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도 넘은 시기에 김남주의 시 ‘노래’를 가요에 맞게 개사한 노래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