웡이자랑
웡이자랑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8.24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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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딸로부터 구조 요청이 왔다. 출산한 지 오십 여일, 육아휴직 중인데 잠을 못 자서 힘들다고 한다. 아기가 잠이 들면 눕혀놓고 한숨 자볼까 하면 바로 눈을 뜬단다. 집안일은 제쳐두고 나도 자야지 마음먹으면 그 순간 귀신같이 알고는 안아 달라 보채니 죽을 지경이라고. 그 심정 헤아리고도 남는다.

나는 동생들과 나이 터울이 있다. 넷째 동생과는 여덟 살 차이, 막냇동생과는 띠동갑이다. 어머니가 물질하러 바당에 가거나 밭일을 하러 가면 나와 두 살 아래인 동생은 애기업개였다. 밖에서 친구들이 노는 소리가 방에까지 들리면 우리는 나가서 놀고 싶어 말똥하게 눈이 떠 있는 동생의 눈을 손으로 가리고 학교에서 배운 동요를 열심히 부르면서 구덕을 흔들었다. 하지만 동생들을 재우고 밖에 나가서 놀아보진 못한 것 같다. 삼신할망이 보고 있는지 나갈라치면 동생은 악을 쓰며 우는 것이다. 언제나 참담한 완패였다.

손녀를 구덕에 눕히고 흔들며 웡이자랑을 흥얼거린다. 구덕을 흔들어대는 엄마가 못 미더운지 딸은 “뇌 흔들림 증후군”을 들먹이면서 살살 흔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엄마 때는 말이야…” 젊은이들 앞에서 꼰대 취급받지 않으려면 삼가야 할 금기어라는데 나도 모르게 라떼가 나온다.

“우리 때만 해도 애기구덕은 필수품이었어. 너의 할머니는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이라 아이를 낳고도 몸조리는커녕 삼일 만에 일하러 가는 게 보통이었지. 아기를 구덕에 짊어지고 밭에도 가고 바다에도 가고…” 유년 시절의 이야기가 스르르 기억의 빗장을 열고 나온다.

그때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내일은 비 날씨가 예정되어 오늘 유채를 다 털어야 하니 애기업개로 결석을 하란다. 부모님은 미안해했지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학교에 가면 분명 구구단을 못 외웠다고 혼날 게 뻔했으므로 이른 아침인데도 기분 좋게 밭으로 따라 나섰다.

어머니가 틈틈이 젖을 물리고 일을 하면 나는 열심히 구덕을 흔들었다. 혼자 구덕을 흔들다가 따분해지면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나가는 구름들의 생김새를 관찰하고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하늘의 풍경이 지금도 기억나는 걸 보면 아마도 애기업개 한다고 결석을 했던 때문이리라.

손녀를 아기구덕에 눕히고 알고 있는 모든 동요를 소환한다. 산토끼가 깡총거리다 지치면 자전거가 따르릉 비켜나라고 외친다. 태극기가 바람에 쉼 없이 펄럭이다가 지칠 즈음이면 손녀는 잠이 오려는지 하품을 한다. 조급증이 생기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내친김에 트로트로 진출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트로트 사랑이 손주를 가수로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최선을 다해 부르는데 더는 못 듣겠는지 안방에서 잠을 청하던 딸이 한마디 한다.

“엄마, 가사가 이상해. 섬마을 선생님과 동백 아가씨가 왔다 갔다 햄신게.”

아뿔싸, 이 노래 저 노래 다 동원해 봐도 옛 어른들이 불렀던 웡이자랑만 못하다. “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애기 재와줍써…” 옛날에 들었던 가락을 흉내 내어 염불을 외듯 조용하게 읊는다. 생각나는 대로 가사를 덧붙이며 무한 반복이다. 잠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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