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퍼
밥 퍼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8.17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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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선 수필가

밥은 한국인의 주식이다. 밥 굶는 자를 위해 돌보는 마음은 사랑이다. 물질의 풍요가 넘쳐도 행복지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눈물을 닦아주는 마음이야말로 사랑의 실천이다. 

제주YWCA회관에서 밥 퍼 목사 강연이 있었다. 최일도 목사는 몇십 년 전부터 해오던 밥 퍼 봉사를 지금까지 한다. 꾸준한 봉사에 머리 조아려 존경한다. 교육관에서는 제한된 좌석 수에 방역과 거리 두기를 철저히 지키며 강의를 열었다. 

최 목사는 독일 유학 준비 중에 청량리역에서 간질 어르신을 만나면서 봉사의 길을 걸었다. 단순한 인사로 건넸던 “진지 드셨나요?” “아니, 나는 먹지 못했어.”라는 대화는 한국인이라면 예의로 하던 말이다. 하지만, 노인은 차림새가 허술하고 몸에서 나는 냄새로 설렁탕 한 그릇조차 식당에서는 먹을 수 없었다. “하루 이틀인가. 내가 들어가면 소금 뿌려.” 최 목사 앞에서 반 그릇 정도의 국물을 들던 노인은 청량리역 건너편 경동시장 바닥에 종이 상자를 깔고 잠을 청했다. 어둠이 깔리자 돌아갈 집조차 없는 노인을 바라봤다.

다음 날, 노인은 시계탑 앞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고향인 함경도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데 나흘이나 굶어서 돌아가셨다. 최 목사는 미래가 보장된 유학길을 떠나야 할지, 하나님 뜻을 받들어야 할지 갈림길에서 고민했다. 노인의 죽음을 바라보았던 춘천 청년은 유학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34년째 밥 퍼 봉사를 해 오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사회적 밀어내기가 되고 있다. 코로나로 죽기보다 배고파 죽겠다는 노인에게 외로움은 더 못 견디게 한다. 동두천에서 청량리까지 온다는 105세의 어르신은 최연장자이면서 지팡이 짚고 살아가는 이유였다. 식사하기 전에 자존심 값으로 백 원 동전 넣기 운동이 천 원, 만 원, 십만 원이 되어 돌아왔다. 차곡차곡 모아진 기금은 노숙인 쉼터 27곳과 시한부 판정 후 무료병원에 입원하는 ‘다일 천사병원’까지 이어졌다.

하루 한 끼 따끈한 밥 퍼 봉사자는 눈높이를 낮추어 일한다. 반 무릎 자세로 전달하며 사랑으로 상대편과 눈을 마주친다. 하던 일이 풀리지 않고 모든 일이 부정으로 보이면 거리의 부랑아가 되고 잠적하게 된다. 빵 한 쪽을 살 수 있는 금전도 없이 절망에 빠졌을 때는 죽음이 코앞이었을 터이다. 당장 일자리가 없어도 밥 퍼 봉사자의 일원이 되어 살아갈 힘을 얻으며 본래의 자리인 가정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가족은 물론 수혜자는 봉사자가 되어 천사의 날개를 달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최 목사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사랑과 자비로서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

平和라는 말은 벼가 골고루 나누어져야 한다는 뜻이 담겼다면서 “같이 밥 먹자.”라고 강조하였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밥 퍼 운동은 계속될 것이라 하면서 강의는 마쳐졌다. 박수 소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따뜻한 오늘이 있어서 하늘바람이 춤추게 하는 하루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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