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리운 계절
비가 그리운 계절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8.10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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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영 수필가

무엇인가 마음의 변화가 생겼을 때 여자는 머리를 자르거나 모양을 바꾼다고 한다.

비도 그런 것 같다. 대자연의 무대를 다시 칠하기 위해서 비는 중요한 소도구인지도 모르겠다.

가을비는 겨우 한밤으로 진눈깨비를 섞기도 하고 봄비는 꽃을 피우기도 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적당히 잘 융합이 되던 예전의 장맛비가 그립다. 풍정과 타협을 거절하는 것처럼 세차게 내리던 비. 이젠 그런 장맛비도 볼 수가 없다.

서머셋 모옴의 ‘비’라는 소설이 있다. 인간의 양심, 종교심, 삶의 균형을 완전히 부수고 바다로 흘러 흩어지는 비. 표류의 포말처럼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비가 거기에 그려있다. 그런 강력한 비의 폭력에 닿아 보고 싶다고 느끼며 그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수년 전 타이티의 모레아섬으로 간 일이 있다. 천국보다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높고 굴곡이 심한 산의 일각이 금세 검은 구름으로 덮히더니 팔과 발등이 아플 만큼 굵은 비가 내렸다. 아니 뿌려지는 느낌이었다. 계속 맞다 보니 피부의 감각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글을 쓰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니까 빗소리를 의음으로 적고 싶었다.

모레아섬의 비는 ‘바다바다 반칙반칙’이라고 하며 하늘에서 물을 붓듯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그것은 두렵게 거대한 식물의 잎을 때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태풍이 올 때마다 나는 그 남태평양의 빗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정열과 시심을 다 써버린 것 같은 소리. 자포자기하고 난폭함만이 무포화하는 그 비소리가 그립다.

비맞는 즐거움이 없어진게 유감이다.

장마철이면 서머셋 모옴의 ‘비’를 연상하며 하염없이 걷던 젊은 시절도 지나갔다.

‘장맛비’는 옛말인가 보다. 

마른장마가 계속되고 나의 마음도 캉캉 말라 간다. 나이 들면서 모든 것에 심드렁해지는 마음.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삶의 불감증을 앓고 있다.

그래도 그리운 게 너무 많다.

수박 먹고 낮잠 자던 그 시간. 울어대던 매미 소리도 듣고 싶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동생하고 싸웠다’ ‘오늘도 순심이와 공기놀이를 하였다’라고 또박또박 노트에 적던 여름방학 숙제가 아프게 그립다.

끊임없이 장대비가 쏟아지던 예전의 제주.

왜 모든 추억이 뼈 속 깊이 사무치는지. 그래도 미련이 남아 일기예보에 비 소식을 찾아본다.

나이 들면서 할 수 있는 것 하나는 기억하며 소중히 꺼내보고 싶은 것을 하나둘 갖는 것인가 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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