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시를 써서 한 사람이라도 읽어 즐겁게”
“알기 쉬운 시를 써서 한 사람이라도 읽어 즐겁게”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7.22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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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學園) 1958년 11월호

1950년대 대표적인 학생 잡지 ‘학원’
당시 학생이던 김광협 시 입선작 수록
박두진 선생 “잘 알고 쓰는 시인” 평가
천지연에 시비 건립…시인 자취 남아

도내 18개 책방들이 참가해서 요즘 한창 진행 중인 책방축제 책섬[:썸]에 우리 책방도 두 개의 전시 프로그램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 중 제주 관련 서적과 자료들을 선보이는 첫 번째 전시가 진행 중이던 이달 초에 한 방송국의 이번 전시홍보가 포함된 방송 제안에 내심 솔깃해서 덜컥 출연을 약속하고 말았다.

구체적인 내용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하겠다고는 했는데 속사정을 듣고 보니 ‘갈수록 태산’이었다. 일이 점점 커지자 심란한 마음에 식언(食言)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방송 날짜도 촉박한 상황이라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 그대로 이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내용 중에 헌책을 입수하는 과정이 포함됐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생각 끝에 전에도 몇 번 소개한 바 있는 제주 골동계의 대모님이 떠올랐다. 마침 며칠 전에 묵은 책이 나온 게 있으니 시간 날 때 와서 보라는 전화도 주셨는데 마침 전시 중이라 못 찾아뵙던 차였다. 연락해서 사정을 말씀 드리니 감사하게도 흔쾌히 받아주셨다.

당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이 끝나고 책을 인수해 와서 나중에 찬찬히 살펴보니 대모님이 주신 책들이 늘 그러하듯이 괜찮은 놈들이 여럿 보였다. 한 가지 아쉽게도 상태가 너무 안 좋았지만 귀한 책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했다. 오늘은 그 가운데 한 권을 소개해 보련다.

바로 1950년대의 대표적인 학생 교양잡지인 ‘학원(學園)’(학원사) 1958년 11월호로, 당시 서귀농림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광협(金光協,1941~1993) 시인의 시 ‘산과 소년과’가 입선작으로 수록되어 주목된다. 시선(詩選)을 맡았던 박두진(朴斗鎭) 선생은 “이러한 시의 세계는 시 쓰는 사람의 체험이 완전한 힘으로 융화되어 시 기교 안에 녹아들지 않고는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아주 잘 되어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 시는 시인의 첫 시집 ‘강설기(降雪期)’(현대문학사, 1970)에 제목을 ‘산과 소년’으로 바꾸고 일부 내용도 고쳐 수록되었고, 세 번째 시집 ‘농민’(태멘, 1981)과 ‘황소와 탱크’(정음사, 1983)에도 재수록된 것으로 보아, 비록 고교시절의 작
품이지만 시인 스스로의 득의(得意)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인에겐 옛 과거시험의 지공거(知貢擧·시험관) 격이었던 박두진 선생과의 인연은 계속되어 “시가 어떠한 것인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인지를 잘 알고 쓰는 詩人(시인)”(강설기의 서문)이라 평가 받기도 하고, 두 번째 시집인 ‘천파만파(千波
萬波)’(현대문학사, 1973)의 제자(題字)와 휘호를 받기도 했다.

스스로 “알기 쉬운 시를 써서 시인 아닌 누구한 사람이라도 읽어 즐겁게” 해야겠다(강설기)는 다짐과 “한 조각의 남은 양심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천파만파)고 고백했던 시인.

“이제/너를 닮아/살겠다는 소년/天地淵(천지연),/네 곁에 영원히 살으리라”(1957년 제1회 한라예술제 당선작 ‘천지연’)던 다짐대로 1996년 시인의 시비(詩碑)가 세워졌건만, 우리 제주의 명승을 찾는 지인들과 수도 없이 간 그 곳에 시인의 자취가 있다는 걸 여직 몰랐다. 부끄럽지만 이제야라도 다음 천지연행(行) 길엔 제일 먼저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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