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뿌리를 찾아서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7.05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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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영 ㈔홀로그램콘텐츠산업협회 이사장·논설위원

미국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에릭 호퍼는 ‘인간의 하늘과 별, 그리고 신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과 탐구는 모든 동물이 가지고 있는 귀소성이라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한다.

산란을 위해 자신이 부화한 강으로 2만㎞를 회귀하는 연어나 북극에서 태어나 남극까지 지구 2바퀴 거리를 날아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극제비갈매기를 보면, 인간이 자신을 세상에 나오게 한 근원과 뿌리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본능일지도 모른다.

지난해 시작된 COVID-19 사태는 특히 공연기획업을 하는 필자에게 직격탄이었다. 세상의 불확실성 증가와 경기 침체로 인한 불안감이 끊임없이 나를 지치고 힘들게 할 때, 아버지는 내게 성주이씨의 본향인 성주로 뿌리 찾기 유적 답사 여행을 제안하셨다. 내심 효도 여행이라 생각하고 동행한 이 여행이, 실은 용기 잃은 아들을 응원하기 위한 아버지의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에서 출발한 우리는 정체 시간을 피해 아침 일찍 고속도로에 올랐다.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요즘 유행한다는 소떡소떡(소시지와 떡으로 만들어진 꼬치)도 사 먹으며 즐거운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첫 목적지인 봉산재(鳳山齋)에 도착했다. 

마침 성주문화원장을 지내신 이시웅 원장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니 성주와 봉산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신다.

“우리 본향인 성주는 가야산, 금오산, 성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낙동강 지류인 이천이 감돌아 흐르고 있어 산수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입니다. 특히 이곳은 성주의 옛 관아 뒤에 수려하게 솟은 봉두산 명당에 자리 잡고 있는 봉산재로, 성주이씨 중흥 시조 농서군공 장경 선조께서 터를 잡으신 곳입니다. 이곳에서 다섯 아드님 모두 과거에 급제시켜 자자손손 가문을 번창하게 한 자랑스러운 유허지이지요.”

후손들이 1856년 유허비를 세우고 1923년 옛 집터에 봉산재를 건립해 농서군공의 영정을 봉안해 오고 있다. 탁 트인 전망 보며 명당을 택해 자리 잡은 선조의 지혜를 느낄 수 있었다.  

봉산재 앞의 성주이씨 시비공원에는 고려 시대의 시조 중 가장 으뜸으로 꼽는 이조년 선생의 다정가(多情歌)와 조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 선생의 오로가(烏鷺歌) 등 교과서에서 익히 보아온 작품들, 그리고 도은 이숭인 선생의 시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 선생의 시 등 당대 문장가로 활약한 17인의 성주이씨 선조 시비가 있어 하나하나 읽으며 그 뜻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었다. 

다음 방문지는 청휘당(晴暉堂)으로, 이곳은 여말삼은(麗末三隱) 중 한 분이며 문장도학에 있어서 당대의 거벽인 도은 이숭인 선생이 귀향 후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경상북도는 고려 말 충신이자 성리학의 기초를 확립한 성리학의 대가인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자 청휘당 중건사업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청휘당에는 작지만 알차게 꾸며 놓은 도은 선생의 박물관이 있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선생의 뜻과 혼을 느낄 수 있었다.

짧지만 이번 답사여행을 통해 천년이 넘게 이어온 성주이씨의 유구한 역사에 비춰, 최근의 COVID-19를 비롯한 일련의 사건은 위기나 장애물이 아닌 우리 삶을 되돌아보고 더욱 굳건히 다지는 계기가 되리라는 자신감과 호연지기가 생겼다. 

이제는 핵가족화를 넘어 1인 가구의 비율이 30%를 훌쩍 넘어섰다. 그런 가운데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우리의 전통인 뿌리 의식이 부족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후손으로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 선조의 유덕을 익히며 자신의 가문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껴본다면, 자신의 앞날에 대해 보다 희망찬 자세와 긍정적이고 바른 역사관을 갖게 될 것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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