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빚 ‘10·19’
제주의 빚 ‘10·19’
  • 고경호 기자
  • 승인 2021.06.2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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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19일. 제주에 휘몰아친 4·3 광풍은 섬과 멀리 떨어진 여수에도 닿았다.

여수 신월동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병력은 이날 제주4·3을 진압하라는 상부의 명령에 불응했다. 이유는 단 하나. “동포를 학살할 수 없다.”

불의에 저항한 군인들의 봉기는 민중의 지지를 얻어 항쟁으로 발전했다.

너무나 당연하고 명확한 ‘명분’은 군인과 민중에게 있었지만 당시 정부는 무력 진압을 택했다.

그렇게 여수와 순천은 물론 전라도와 경상남도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14연대 병력이 불의에 저항하지 않았다면 더욱 많은 무고한 도민들이 희생됐을 것이다.

그래서 제주로서는 이들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제주4·3의 완전한 해결 과정에서 여수·순천 10·19사건(이하 여순사건)이 거듭 조명돼왔던 이유다.

제주4·3은 특별법이 제정되고, 다시 개정되면서 역사적인 진전을 이뤄나갔지만 여순사건은 제자리였다.

4·3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다시 개정되면서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배·보상 근거가 마련되고, 또 이 과정에서 대통령의 공식 사과도 이뤄졌지만 4·3의 광풍으로 촉발된 여순사건은 소외돼왔다.

그러나 유족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기나긴 기다림과 투쟁 끝에 첫 발의 후 20년 만인 29일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이끌어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환영의 인사와 함께 여순사건 유족들을 위로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동병상련의 마음을 담아 적극 환영의 입장을 밝힌다”며 “힘들게 제정된 특별법을 통해 여순사건에 대한 역사의 진실을 바로잡고, 희생자와 유족들이 오명의 굴레를 벗어던져 진정한 명예회복이 이뤄지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제주4·3연구소 역시 “향후 작성될 국가 차원의 공식 보고서는 민간인 학살을 정부가 인정하는 것으로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며 “깊은 연대와 위로를 보낸다”고 밝혔다.

4·3의 비극이 없었다면 여순사건도 없다. 제주가 여순사건을 기억하고 연대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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