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혀진 서훈
묻혀진 서훈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6.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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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선 수필가

역사문화탐방에 나섰다. 독립운동가의 항일투쟁 자취를 찾아서 남원읍·표선면 일대를 다녀왔다. 제주 출신 독립운동가는 육백여 명에 이르나 백팔십여 명만 서훈자이다. 나머지 사백여 명은 어디로 갔을까.

이번 탐방에는 무극대도교 신도 중 열여덟 명이 서훈을 받지 못한 중에 오병표의 후손인 손자가 동참하였다. 법정사 투쟁 이후 잠잠한 뒤에는 무극대도교가 자리하며 항일 운동에 동참하였다. 흥사단에서는 보훈청에 서훈 신청을 거듭하던 중에 20211월에 여덟 명의 서훈 찾아주기에 좋은 소식이 오고 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후손은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며 대가 끊긴 후손도 많다. 많던 재산은 조선독립을 위해 헌납하며 살았는데 남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그분들에게 많은 빚을 걸머지고 있다.

그들은 애국 사상과 국권 회복 운동에 뜻을 두어 지금보다 치열한 내 나라 살리기에 노력한 사람이다. 제주도 전역에 걸쳐 일제강점기에 숨은 공로자들의 미 서훈자 찾기에 힘을 쏟고 있는 단체에 박수를 보낸다.

표선면 성읍에 위치한 조몽구 일가의 생가 터 와 묘비를 찾아 나섰다. 조몽구는 광복이 되고 4·3을 겪으면서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된다. 피신의 일상 속에서 아버지와 아내와 네 자녀는 표선 바닷가 한모살에서 처형되는 비참함을 겪었다. 조몽구는 일체 말을 삼가다가 1973년 사망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 낭푼이 하나에 여러 개의 수저를 꽂았다는 일화는 가슴 아프게 한다.

그의 가족묘지에 이르렀다. 영주산에 1호 묘지 피장자가 되어 맨 구석에 있다. 친족이 묘지를 돌봐오다 봉분 없는 평장으로 이장했다. 옆면과 뒷면에 아무 글씨도 없는 현실이 목울대를 적신다. 아버지의 묘비에 장남의 이름은 새겨졌으나 차남 몽구자리는 구 자만 새기고 동그라미로 되어 있다. 연좌제의 아픔을 보게 한다.

가시리 오승언 생가 터는 빈터만 남아 생각할 여운을 남긴다. 무극대도 신도로서 포교에 온 정열을 쏟으며 내면으로는 임시정부에 크나큰 재원을 보냈다. 그러나 지금의 후손은 어찌 살고 있을까.

무극대도교. 우리에게는 낯선 종교단체였으나 일제강점기에는 교단에서 강의와 재력을 모아 임정의 자금 조달에 전했다. 네커리 집이었다니 당시의 세력을 알 만하게 마을 안 과수원 터에 자리한 곳이었다. 초가 네 칸으로 숙식도 한 곳에서 하고 비밀지령 교육도 이루어졌던 곳이다. 명도암의 교단보다 앞서 건축되었다 한다.

제주에서 태어나고 육십 평생 넘게 살면서 나보다 남을 위하여 고개를 돌려보던 일은 얼마나 되었을까. 가슴 뭉클하게 한 하루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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