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품은 물방울
꿈을 품은 물방울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6.07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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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순 김창열미술관 관장

별에도 색이 있다. 여린 잔상처럼 색을 품고 있다. 파란 별이 붉은 별보다 더 뜨겁다고 한다. 노란 별, 하얀 별, 보랏빛 별을 찾게 되었을 때의 기억은 아련하고 그립다. 도시 불빛 없이 온통 캄캄해야 비로소 보이는 세계다. 미세한 색의 변화를 볼 줄 알아야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김창열의 물방울도 모두 같은 하얀 색이 아니다. 투명한 듯 연한 여러 색을 품고 있다. 밤하늘의 별빛 정도로 서로 다르다. 흩뿌려진 물방울 제각각은 스스로 이미 자신의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빛이 통과하는 물방울은 원래 온갖 색을 담게 된다. 프리즘처럼 물방울은 빛을 산란하게 한다. 우리는 비 그친 늦은 오후 무지개가 왜 그리 찬란한지를 이해한다. 김창열의 물방울에서는 그림자 반대쪽 하이라이트 옆으로 옅은 무지개색이 가늘게 걸린다. 통과된 빛이 그림자에 뿌리거나 응집시킨 색을 물방울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별 속의 색이 즐거움을 준다면 보일 듯 말 듯 다가오는 물방울도 그렇다. 멀리서는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이는 몇 작품도 있다. 어두운 벽면을 배경으로 환하게 보이도록 전시한 작품들이다.

한참을 다가가 그림 속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야만 비로소 보인다. 비스듬히 한쪽으로 연이어진 물방울, 아니면 작은 물방울로 화면 전체에 고르게 가득한 것을 가까이 가서야 발견할 수 있다. 미시적 시각과 경이로움의 크기가 극명한 반비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나 할까. 

이런 역설적 효과는 김창열 예술에 산재해 있다. 살아있는 자연처럼 생생한 사실성은 예술적 환상을 빚어낸다. 흔들리듯 맺힌 물방울은 캔버스에 그려진 사물이 아닌 것만 같다. 
전시를 고심할 때 돌아보게 되는 것이 있다. 몇 년 전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전시가 성황을 이룬 적이 있다.

어떤 형태도 찾기 어려운 색 면이 그냥 떠 있는 평면 그림이 어떻게 서울에서 블록버스터 전시가 될 수 있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황적 심리와 유대인 로스코의 형이상학적 추상이 우리에게 공감되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창열의 화면도 그럴 소지를 다분히 보여준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초기 작품에서 두텁고 거친 필치로 풀어낸 것이 우선 그랬다. 로스코의 감성이 2010년대 서울을 울렸다면, 김창열도 전쟁의 상흔을 바탕에 깔고 있다. 물방울은 그 승화다. 물방울 반짝임과 대비되는 일련의 얼룩들은 밝음을 빛나게 하는 어둠이다. 밤이 짙어야 별빛이 빛나듯 어두움이 있어야 밝음을 그릴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다. 여기서 얼룩의 부드러운 부피감과 짙은 가장자리로 이루어지는 화면의 긴장은 확실히 미적이기도 하다.

연초부터 미술 시장도 뜨거웠다. 작품 경매에서 김창열 그림이 매번 주목받고 있다. 소더비와 크리스티는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사들이다. 얼마 전 홍콩 크리스티에서는 김창열미술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크기의 작품가가 14억3000만원을 기록했다. 올해 5월까지 김창열미술관의 관람 인원도 평년 평균의 1.7배, 관람객이 많았던 해에 비해서도 1.4배 늘었다. 예술성과 전문성 없이 그런 시장 가치와 대중성이 나올 수는 없다.

김창열미술관의 ‘꿈을 품은 물방울’ 전은 그와 같은 예술성과 전문성을 가진 작품들의 전시다. 대체로 거친 마포와 한지 표면 위에서 상대적으로 반짝이는 물방울들이다. 부드러움과 대조되는 밀도도 잊지 않고 있다. 게다가 없는 듯 나타나는 미적 자극 또한 어떤 예술성 못지않은 지점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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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순 2021-06-10 23:57:51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