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수형 피해자 재심 본격화…명예회복 기대
미군정 수형 피해자 재심 본격화…명예회복 기대
  • 고경호 기자
  • 승인 2021.05.2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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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이전인 1947년 3·1 발포사건 및 3·10 총파업 당시
미군정 법정 기소 억울하게 옥살이한 24명 재심 청구
4·3도민연대는 2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947년 미군정 시기 일반재판에 기소돼 유죄를 선고받은 수형 피해자 24명에 대한 ‘4·3재심 청구서’를 제출하게 된 배경과 필요성 등을 강조했다.
4·3도민연대는 2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947년 미군정 시기 일반재판에 기소돼 유죄를 선고받은 수형 피해자 24명에 대한 ‘4·3재심 청구서’를 제출하게 된 배경과 필요성 등을 강조했다.

제주4·3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1 발포사건과 3·10 총파업 당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도민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본격화됐다.

1948년 4·3 이전 미군정 법정에 기소돼 범법자가 돼 버린 당시의 도민들이 73년 만에 대한민국 법원에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대표 양동윤·이하 4·3도민연대)는 20일 제주지방법원을 방문해 1947년 미군정 시기 일반재판에 기소돼 유죄를 선고받은 수형 피해자 24명에 대한 ‘4·3재심 청구서’를 제출했다.

재심을 청구한 24명 대부분은 4·3 이전인 3·1 발포사건과 3·10 총파업 이후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대장이 행사한 ‘포고령 2호’를 이유로 법정에 끌려가 억울하게 죄인이 됐다.

1947년 3월 1일 현재 북초등학교 일대에서 열린 ‘제28회 3·1 기념식’ 당시 경찰의 총격으로 도민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총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6살가량의 어린 아이가 기마경찰의 말굽에 치이자 도민들이 분노하며 항의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이 선량한 이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3·1 발포사건은 당시 조선에서 처음 발생한 ‘관공리 총파업’(3·10 총파업)으로 확산했다.

군정당국은 3·10 총파업에 맞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우파 청년단체원들을 제주에 대거 내려 보내 물리력으로 검거 공세를 전개했으며, 1948년 4월 3일까지 제주도민 2500여명이 무차별 검거됐다.

재심청구자들과 4·3도민연대는 이날 재심 청구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제주지방법원 정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도 점령 미군정청에 의해 1947년 3·1 기념식 이후 검속되고 재판에 넘겨진 피해자들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재심을 청구한다”고 피력했다.

이들은 “3·1 발포사건 이후 같은 달 14일 조병옥 경무부장이 제주에 왔다. 경찰책임자로서 사망한 유족과 부상자에 대한 어떠한 유감 표명도 없이 3·1 발포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했다”며 “조병옥은 건국에 방해되는 무질서 상황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3·1 발포사건과 3·10 총파업에 가담한 도민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고, 이들 중 일부가 재판에 회부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기소된 3·1 발포사건 관련자들은 1947년 4월 3일 제주지방심리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당시 미군정이 직접 재판을 맡았다”며 “같은 달 12일 스티븐슨 대위가 주심, 스타우드 소령이 검찰관을 맡아 진행된 제3차 재판에서 애월교 교사 이경천은 징역 8개월과 벌금 8000만원을 선고받았다”고 말했다.

이경찬 교사의 유족은 이날 4·3재심 청구서를 제출한 24명 중 한 명이다.

이외에도 안덕면에서 3·1 기념식을 주관하고 씨름대회를 개최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옥고를 치른 안덕면 민청위원장의 유족, 한림에서 열린 3·1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유죄 판결을 받은 금악리 주민의 유족도 재심을 청구했다.

또 1947년 안덕면 공무원들이 하곡수매를 독려하기 위해 동광마을을 방문했다가 주민들과의 충돌이 발생한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마을 청년들의 억울함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한 재심 청구도 포함됐다.

이들은 “당시 동광리민들은 흉년으로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공무원에게 수매량을 조절해달라고 청원한 젊은이들은 결과적으로 감옥에 갇혀버렸다”며 “‘공출반대’ 죄목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줄 것을 기대하고 재심 청구에 나섰다”고 피력했다.

이어 “경찰에 쫓기는 마을 청년들을 집안에 숨겨줬다는 이유로, 평생 집과 학교를 지었던 시골 목수가 조직 등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더욱이 무슨 이유로 체포됐는지도 모른 채 형무소에 수감되고 심지어 감옥에 간 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온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했다”며 “1947년 미군정 시기 부당한 공권력의 피해는 사법정의의 이름으로 당당히 회복돼야 한다. 늦었지만 이번 재심 청구를 통해 73년 전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고 피해자의 명예와 회복되는 역사적인 판단을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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