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피는 벚꽃이지만
매해 피는 벚꽃이지만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4.0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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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베란다로 나선다. 만발한 벚꽃이 마음까지 고운 빛으로 물들여 주는 것 같다. 아파트에 살지만 집 앞 가로수로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매해 이맘때면 눈 호강을 한다. 절정을 향해 하루하루 다르게 피어나는 벚꽃을 보는 즐거움에 나도 모르게 벚꽃엔딩을 흥얼거린다. 달콤한 삼박자 커피 한잔까지 곁들이니 이보다 행복한 아침이 또 어디 있을까.

꽃망울을 보일 때부터 조바심치던 기다림에 비하면 꽃을 보여주는 시간은 길지 않기에 볕 좋은 날엔 되도록 짬을 내어 꽃길을 걷는다. 처음 입주 했을 땐 언제면 꽃을 볼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두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을 만큼 자라 단단한 몸짓을 자랑한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들처럼, 가늘고 앙상하던 어린 나무가 많은 추억들을 안겨 주며 듬직하게 자라 아파트를 지키고 섰다.

평소에 꽃 같은 것을 사서 나르는 일이 없는 무덤덤한 남편이었지만, 술 한 잔 하고 들어오는 길에 어쩌다 기분이 좋으면 꽃을 따서 머리에 꽃아 주기도 했다. 가로수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멀리 가지 않아도 손잡고 거닐 수 있는 산책길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집 앞 벚나무는 신접살림하는 새내기 부부의 지갑을 털지 않아도 함박만한 웃음 날리는 시간을 가끔씩 선물해 주었다.

내일부터는 비 날씨라고 한다. 비바람이 불어오면 분분히 사라져버릴 생각에 외출을 서두른다. 꽃구경 간다고 먼 곳까지 가지 않아도 추억이 깃든 벚나무 하나하나에 사연을 끄집어내어 들추다보면 한 떨기 바람이 찾아 와 꽃비를 뿌려 주리라.

하르르 꽃비 내리는 모습을 보며 벤치에 앉아 있으니 한 해 두 해 옛 일들이 지나간다. 입주한지 벌써 스무 남은 해가 훌쩍 가 버렸다. 벚나무 밑동이 굵어지는 만큼 내게는 휜 머리가 늘어 세월의 무상함을 생각하게도 한다.

올해는 예기치 못 한 병원생활을 하고 나온 후라 바닥에 흐드러진 꽃잎도 예사롭지 않게 여겨진다. 조심스레 내딛는 발자국에 나를 어루만지듯 시 한편 바람을 타고 와 살포시 닿는다.

 

햇살은 아직 야위었지만 당신 뺨을 비추기엔 모자라지 않아서

나는 당신 앞으로 슬며시 커피를 밀어 놓았던 것인데

 

커피 잔 휘휘 저으며 지금까지의 이별은 까마득히 잊고

당신과의 이별이 걱정되었던 이른 봄

 

꽃이 지고 다시 꽃 피는 그 사이

벚꽃 잎 짧게 빛났던 허공

 

가만히 맨 손 쓰다듬으며

분홍의 시절에게 이르길

우리 한 생애가 이렇게 나란히 앉았으니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사랑인 것이지

 

-최갑수 벚꽃 커피 당신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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