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서러울 때는 명이 길어서 따뜻한 밥 먹고. 따뜻한 집에서 자고. 따뜻한 옷을 입을 때야. 밥 한 끼 배불리 먹지도 못하다 죽은 아버지, 어머니, 오빠, 언니, 동생들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
1948년 당시 12살이던 김평순 할머니(86·안덕면 창천리)는 결혼한 큰 오빠 식구까지 열 세 가족이 함께 살았다.
그리고 유난히 추웠던 그 해 겨울이 지나자 옆에는 8살 남동생뿐이었다.
제주4·3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대통령이 사과하고, 4·3특별법이 제정되고 다시 개정되면서 명예회복과 배·보상의 길이 열렸지만, 김 할머니는 여전히 비극의 역사 속에 갇혀있다.
1948년 11월 24일. 경찰이 마을에 들이닥치더니 주민들을 모두 부락 사무실 앞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김 할머니의 아버지가 가장 먼저 총에 맞아 죽었다. 이유는 ‘도피자 가족’에게 가행된 ‘대살’(代殺).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진압군은 가족 중 청년이 한 명이라도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며 주민들을 총살했다. 주민들은 이를 대살이라고 불렀다. ‘살인한 자를 사형에 처함’이 사전적 의미지만 주민들은 ‘가족 대신 죽는다’는 뜻으로 이 표현을 사용했다.
김 할머니는 “그 때 큰 오빠는 24살이었다. 다른 청년들이 오빠한테 남로당에 가입하라고 선동하자 오빠는 (다른 곳으로) 피해버렸다”며 “그런데 경찰지서 주임까지 와서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죽였고, 집에 불을 질렀다. 길에 다니는 사람들 중 남자가 보이면 모두 총살했다. 그래서 이 날 제사하는 집이 많다”고 회상했다.
눈앞에서 아버지가 총살당했지만 이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경찰들이 도피자 가족들을 수용소에 모여 지내게 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김 할머니의 어머니와 또 다른 오빠, 그리고 셋째 언니가 경찰에 끌려갔다.
김 할머니는 “어머니가 ‘나는 죽여도 좋으니 제발 딸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셋언니는 지서로 끌려가 갇혔고, 엄마랑 오빠는 총살당했다”며 “셋언니가 지서에서 밤새 울면서 ‘동생들은 나 없으면 못 산다’고 애원하자 지서장이 풀어줬다. 이후 셋언니와 함께 엄마와 오빠가 총살당한 곳으로 가보니 시신이 그대로 있었다. 총으로 사람이 죽는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엄마와 오빠를 밭으로 모셔가 흙으로 덮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에게 불어 닥친 4·3의 광풍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김 할머니를 포함해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수용소에 갇혀 있던 주민들은 곶자왈로 피신했지만 곧 들이닥친 토벌대를 마주해야 했다.
16살 언니와 8살 동생은 포승줄에 묶여 끌려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모두 총살당했다.
김 할머니는 “갑자기 곳곳에서 총소리나 나자 우리보고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팍’ 하고 눈 위에 엎드리자 총성이 시작됐고, 한참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와 옷이 벌겋게 물들었다. 순간 ‘살았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내 등에 업혀 있던 막내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걸 알게 됐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겨진 김 할머니의 가족들은 당시의 총격으로 모두 사망했다.
이후 포승줄에 묶였다가 죽은 줄만 알았던 8살 동생을 다시 찾았지만 세상에 남겨진 가족은 열세 명에서 단 둘로 줄었다.
김 할머니는 “정말 힘들게 살았다. 길에 앉아 울고, 배고파 울어도 ‘살암시민 살아진다’는 위로 한 마디, 밥 한 숟가락도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며 “살기 위해 돈을 빌리려고 해도 ‘폭도 자식’, ‘빨갱이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당해야 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악착같이 살면서 다시 ‘가족’을 꾸렸지만 마음에는 12살 때의 식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김 할머니는 “밥 먹고, 옷 입고, 편안하게 누워 잘 때마다 식구들이 생각난다. 밥 한 끼라도 배불리 먹고 죽었으면 이렇게까지 애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TV에서 이산가족 찾는 사람이 나오면 나랑 닮은 것 같아서, 그 때 죽은 우리 오빠, 언니 같아서 아닌 줄 알면서도 보게 된다. 너무 억울하고 서럽다”고 말했다.
12살 소녀가 짊어져야 했던 4·3의 비극은 여든 여섯이 된 지금도 변함이 없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