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자 가족’ 몰려 식구 11명 총살…4·3 비극에 갇혀 산 73년
‘도피자 가족’ 몰려 식구 11명 총살…4·3 비극에 갇혀 산 73년
  • 고경호 기자
  • 승인 2021.04.01 1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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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서러울 때는 명이 길어서 따뜻한 밥 먹고. 따뜻한 집에서 자고. 따뜻한 옷을 입을 때야. 밥 한 끼 배불리 먹지도 못하다 죽은 아버지, 어머니, 오빠, 언니, 동생들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

1948년 당시 12살이던 김평순 할머니(86·안덕면 창천리)는 결혼한 큰 오빠 식구까지 열 세 가족이 함께 살았다. 
그리고 유난히 추웠던 그 해 겨울이 지나자 옆에는 8살 남동생뿐이었다.

김평순 할머니가 지난달 31일 본지와 인터뷰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평순 할머니가 지난달 31일 본지와 인터뷰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제주4·3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대통령이 사과하고, 4·3특별법이 제정되고 다시 개정되면서 명예회복과 배·보상의 길이 열렸지만, 김 할머니는 여전히 비극의 역사 속에 갇혀있다.

1948년 11월 24일. 경찰이 마을에 들이닥치더니 주민들을 모두 부락 사무실 앞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김 할머니의 아버지가 가장 먼저 총에 맞아 죽었다. 이유는 ‘도피자 가족’에게 가행된 ‘대살’(代殺).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진압군은 가족 중 청년이 한 명이라도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며 주민들을 총살했다. 주민들은 이를 대살이라고 불렀다. ‘살인한 자를 사형에 처함’이 사전적 의미지만 주민들은 ‘가족 대신 죽는다’는 뜻으로 이 표현을 사용했다.

김 할머니는 “그 때 큰 오빠는 24살이었다. 다른 청년들이 오빠한테 남로당에 가입하라고 선동하자 오빠는 (다른 곳으로) 피해버렸다”며 “그런데 경찰지서 주임까지 와서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죽였고, 집에 불을 질렀다. 길에 다니는 사람들 중 남자가 보이면 모두 총살했다. 그래서 이 날 제사하는 집이 많다”고 회상했다.

어린 시절 김평순 할머니(사진 오른쪽)의 모습.
어린 시절 김평순 할머니(사진 오른쪽)의 모습.

눈앞에서 아버지가 총살당했지만 이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경찰들이 도피자 가족들을 수용소에 모여 지내게 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김 할머니의 어머니와 또 다른 오빠, 그리고 셋째 언니가 경찰에 끌려갔다.

김 할머니는 “어머니가 ‘나는 죽여도 좋으니 제발 딸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셋언니는 지서로 끌려가 갇혔고, 엄마랑 오빠는 총살당했다”며 “셋언니가 지서에서 밤새 울면서 ‘동생들은 나 없으면 못 산다’고 애원하자 지서장이 풀어줬다. 이후 셋언니와 함께 엄마와 오빠가 총살당한 곳으로 가보니 시신이 그대로 있었다. 총으로 사람이 죽는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엄마와 오빠를 밭으로 모셔가 흙으로 덮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에게 불어 닥친 4·3의 광풍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김 할머니를 포함해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수용소에 갇혀 있던 주민들은 곶자왈로 피신했지만 곧 들이닥친 토벌대를 마주해야 했다.

16살 언니와 8살 동생은 포승줄에 묶여 끌려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모두 총살당했다.

김 할머니는 “갑자기 곳곳에서 총소리나 나자 우리보고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팍’ 하고 눈 위에 엎드리자 총성이 시작됐고, 한참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와 옷이 벌겋게 물들었다. 순간 ‘살았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내 등에 업혀 있던 막내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걸 알게 됐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겨진 김 할머니의 가족들은 당시의 총격으로 모두 사망했다.

이후 포승줄에 묶였다가 죽은 줄만 알았던 8살 동생을 다시 찾았지만 세상에 남겨진 가족은 열세 명에서 단 둘로 줄었다.

김 할머니는 “정말 힘들게 살았다. 길에 앉아 울고, 배고파 울어도 ‘살암시민 살아진다’는 위로 한 마디, 밥 한 숟가락도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며 “살기 위해 돈을 빌리려고 해도 ‘폭도 자식’, ‘빨갱이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당해야 했다”고 말했다.

김평순 할머니가 가족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다.
김평순 할머니가 가족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다.

김 할머니는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악착같이 살면서 다시 ‘가족’을 꾸렸지만 마음에는 12살 때의 식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김 할머니는 “밥 먹고, 옷 입고, 편안하게 누워 잘 때마다 식구들이 생각난다. 밥 한 끼라도 배불리 먹고 죽었으면 이렇게까지 애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TV에서 이산가족 찾는 사람이 나오면 나랑 닮은 것 같아서, 그 때 죽은 우리 오빠, 언니 같아서 아닌 줄 알면서도 보게 된다. 너무 억울하고 서럽다”고 말했다.

12살 소녀가 짊어져야 했던 4·3의 비극은 여든 여섯이 된 지금도 변함이 없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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