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에 입대한 소녀의 사연…“빨갱이 누명 벗어야 했다”
19살에 입대한 소녀의 사연…“빨갱이 누명 벗어야 했다”
  • 고경호 기자
  • 승인 2021.03.24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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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빨간 줄’ 때문에 이미 우리 가족은 ‘폭도’ 가족이 돼 버렸다. ‘내가 군인으로 가서 빨갱이 누명을 벗어야지!’ 그 생각뿐이었다.”

제주4·3 당시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아버지를 대신해 소녀가장의 삶을 살아야했던 정봉영 할머니(87)는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19살의 나이에 여군에 지원했다.

10대 소녀 시절 4·3을 겪어낸 여성들의 생생한 증언이 제73주년 4·3희생자추념일을 앞두고 책으로 출간됐다.

제주4·3연구소(이사장 이규배·소장 허영선)는 4·3을 살아낸 여성들의 구술집 ‘4·3과 여성2, 그 세월도 이기고 살았어’를 최근 펴냈다.

지난해 4·3 여성 생활사를 처음으로 조명해 주목을 끌었던 ‘4·3과 여성, 그 살아낸 날들의 기록’에 이은 두 번째 구술집이다.

4·3의 비극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생과 사의 경계에서 살아낸 과정을 생생하게 꺼내 놓은 6인의 이야기는 4·3 여성사, 그 자체다.

송순자 할머니(83)는 4·3 당시 아버지가 행방불명됐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머니와 함께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송 할머니는 피난과 굶주림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았다.

송 할머니는 “부잣집 사람들이 쌀 항아리에 막대기를 놔두면 쥐가 그걸 타고 들어간다. 이 때 옆집 어른이 그 쥐를 잡아줬다”며 “식탈이 난 동생에게 쥐를 먹이면 배가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4·3 때문에 먹을 것 없이 피난 다닐 때 제일 생각나는 게 쥐 먹은 것”이라고 회상했다.

김을생 할머니(85)는 4·3 당시 아버지가 행방불명되면서 14살의 나이에 가장이 됐다.

김 할머니는 “긴 소나무를 지고 오다보면 억새에 걸려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이 이리저리 돌아가면서 왔다. 어떤 날은 누가 보면 창피할까봐 집 뒤로 돌아가서 장작을 팼다”며 “시집가기 전까지 장작 해다 말려서 팔았다”고 얘기했다.

4·3의 광풍 속에 아버지와 언니, 형부, 조카를 잃은 양농옥 할머니(90)는 아버지가 항아리에 감춰 놓은 돈을 밑천 삼아 여동생과 삶을 꾸렸고, 7살에 아버지를 잃은 고영자 할머니(80)는 옹기를 등짐지고 할머니들과 팔러 다니며 평생을 노동 속에 살아야했다.

허영선 소장은 “죽을 것 같은 세월을 버티고 견뎌낸 4·3의 여성들은 ‘삶이란 이런 것이다’를 말없이 보여준 존재들”이라며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혹한을 이겨내고 살아낸 위대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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