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부터 새벽까지
밤부터 새벽까지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3.23 17: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가영 수필가

필요한 전자제품을 사지만 사용 설명서를 읽지 않는다. 어려워서이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그게 문제다.

그런 자신을 알고 있지만 잘 안 된다. 나이 들면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지만 사실 젊었을 때도 그랬다.

난 왜 끝까지 사용설명서를 읽지 못하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 어떻게 되겠지 하며 설명서를 보관함에 넣어 둔다. 버리지 않는 것만도 어딘가. 당연히 제품이 고장 날 때까지 설명서를 꺼내 보는 일은 없다.

지난 밤. 오랜만에 오디오로 음악을 듣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작동이 안 된다. 왜지? 하고 이것저것 조작을 해보는데, 먹통이다. 오래된 것도 아닌데.

두 시간이 흘렀다. 이렇게 되면 이상한 성격이 발동한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 라기 보다 어느 덧 자존심 대결이다.

사용방법을 모르는데 이길 재간이 있나. 애쓰다 보관함에서 설명서를 꺼내 들고 쭉 읽어보는데, 모르겠다.

그래도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펜치를 손에 잡고 다시 두 시간. 사투다.

차라리 전부 해체해서 복구할 요량으로 뜯어내기 시작한다. 대담하고 전투적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희곡 파멸, 그녀가 말했다를 대뇌이며 해체하지 않으면 재생할 수 없는 것도 있다고.

새벽이 오는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아서 자존심을 접고 설명서를 자세히 보려고 하니 안경이 없다.

안경은 어디 있지? 책상 위, 식탁 위, TV. 없다. 더욱 절실해진다.

심지어 옷장 안 서랍까지 뒤져 본다. 찾아 헤매고 뒤지다 발견한 곳은 베란다 선반 위 화초 옆이다. 그 녀석이 거기 있었다.

안경 역시 단 번에 찾은 적이 없다.

찾아 쓰고 세면실에 섰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소스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름, 얼룩, 기미, 흰머리. 수십 년을 살아온 내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순간 놀라기도 했지만 묘하게 납득이 갔다.

후기 고령자장수로 바꾼다 해도 장수를 축복할 마음이 내겐 없다.

늙음이란 이미 무엇이든 알고 나서 나는 이것으로 좋다는 정신이 아닐까.

서툴다고 아프다고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하루하루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사는 것. 그 때까지 가는 것이다.

깊은 밤까지 이렇게 오기를 부리는 기회가 언제다시 올 수 있을지.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