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
봄의 전령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2.0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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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입춘 소식에 설레는 마음으로 냉이 캐러 갈 채비를 한다. 슴슴하게 된장국을 끓이고 남은 냉이는 끓는 물에 데쳐 나물로 무쳐야지. 생각만 했는데도 이미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있다.

하늘에 별이 되신 형님은 살림도 야무진 분이지만 음식솜씨도 남달라 동네에서 소문난 분이셨다. 봄볕이 따사로운 어느 날이었다. 입덧이 심해 먹성이 부실해진 어린 동서가 안쓰러웠던가 보다. 한번 먹어보라며 된장을 풀어 놓고 냉잇국을 끓여 주셨다. 다행히 입맛에 맞아 한 그릇을 다 비우고도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봄이 되면 그때의 그 맛이 입안에 맴돌아 형님이 끓여주던 냉잇국이 무시로 먹고 싶어진다.

언 땅 뚫고 나온 냉이로

된장 풀어 국 끓인 날

삼동 끝 흙빛 풀어진 국물에는

풋것의 향기가 떠 있는데

모든 것 당신에게 바친다는 냉이의 꽃말에

찬 없이도 환해지는 밥상머리

국그릇에 둘러 피는 냉이의 꽃말은

허기진 지아비 앞에

더 떠서 밀어 놓는 한 그릇 국 같아서

국 끓는 저녁마다 봄, 땅심이 선다

-김승해 냉이의 꽃말중에서

형님은 철이 덜 든 동서에게 살림하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송편 빚는 법과 고사리 잘 꺾는 요령, 계절마다 김치 담그고 장아찌 담는 법까지. 시부모 없는 집에 시집온 어린 동서에게 기꺼이 어머님 역할까지 하느라 늙어버렸던 건 아닌지 세월 흐른 지금에야 생각나는 걸 보면 이제야 철이 나는가 싶다.

당근밭을 둘러보니 하얗게 냉이꽃이 피어 있다. 고랑마다 앉아 있는 봄의 전령들. 추운 겨울을 이겨낸 냉이는 큰며느리로 집안일을 도맡아했던 형님의 든든한 성품과도 닮았다.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듯 캐는 순간 코끝을 간질이며 땅속 기운을 몸 전체로 전해 준다. 해마다 오는 봄이지만 나에게로 오는 첫걸음 같아 늘 설렌다.

연한 것으로 골라 캐는데 기억 속 따뜻한 추억들이 봄 순 마냥 땅을 비집고 나온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기억들이 햇살 깃든 밭담에다 자분자분 동서지간의 사연들을 자연스레 진설해 놓는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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