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처럼 맑게 두 눈을 열고…
소처럼 맑게 두 눈을 열고…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21.01.18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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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주 편집인·주필·부사장

올해가 ‘흰 소의 해’여서 그런가. 신문이나 잡지에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그림은 단연 이중섭(1916~1956) 의 ‘흰 소’다. 피골이 상접해 있지만, 치솟는 기세. 더욱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것은 이 ‘흰소’의 강렬한 눈이다. 왜 이렇게 눈의 깊이가 아득할까.

문득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조국, 하나의 사랑- 이중섭의 아내’(2014)의 장면들이 떠오르고, 영화 속의 색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스쳐 간다. 어린 두 아들을 안고 있는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 다섯 살이나 네 살쯤 됐을까. 까까머리에 수줍은 아이의 얼굴이 내 유년 시절을 보는 듯하다. 소를 사랑한 화가의 서귀포 피난과 가난, 아내의 폐결핵과 각혈, 영양실조에 걸린 두 아이들. 그래서 서귀포 앞바다의 푸른 물빛이 더 시리다.

▲2018년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의 기획전 ‘소, 사랑하는 모든 것’에서는 소가 주제·소재인 이중섭 작품 20점을 전시한 적이 있다. ‘소’ ‘흰 소’ ‘움직이는 흰 소’ ‘황소’ ‘싸우는 소’ ‘소와 아이’ ‘소와 새와 게’ 등등…. 

어린 시절 필자의 고향집에도 코끼리만큼 큰 소가 있었는데 소가 이렇게 인간적 감성적이었는지는 그 때 처음 알았다. 소 그림 앞에 서니 가슴이 뭉클하고 아릿했다.

이중섭은 어릴 때부터 소 그리기를 아주 좋아했다. 오산학교 다니던 어느 날, 남의 집 소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소도둑으로 몰려 고발당한 적도 있을 만치 “소의 커다란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저 행복했다”고 한 그였다. 소를 더 잘 그리고 싶었던 이중섭은 그림 공부를 위해 유학을 결심한다. 그리고 20세에 이중섭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 일본인 여성 마사코를 만난다. 

▲6·25전쟁이던 1951년 서귀포에 피난을 왔는데 그가 이때 남긴 유일한 시(詩) ‘소의 말’은 이렇게 읊었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서귀포 자구리해안이 보이는 작은 집.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방에서 그들은 행복했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마사코는 먹을 것이 부족해서 날마다 서귀포 앞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아먹었는데 그 게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게 그림을 그렸다고 회고한다. 그러면서도 “서귀포에서 네 식구가 가난하지만 단란하게 살았던 동안은 내 생애 마지막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민족과 국경을 뛰어넘는 부부의 불 같은 사랑. 이산(離散)의 아픔과 가족애 등이 이 다큐멘터리의 소재였다.

▲어떤 사람은 그의 소 그림을 두고 “소의 눈동자는 아름다운 애련(哀戀)”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소에는 더 깊은 심연(深淵)이 있어 보인다.

이중섭이 6·25 당시 미국 공보원장 맥 타거트에게 소 그림을 보여줬다가 크게 상심한 일화가 그러하다. “훌륭하다. 감동했다. 힘이 넘치는 황소는 스페인 투우를 그린 것 같다”며 작품을 사고 싶다고 한 그에게 “내 그림은 스페인 소가 아닌 착하고, 고생하는 우리 소”라며 판매를 거부하고 집에 돌아가 며칠 동안 울며 지냈다고 한다. 

불교에서 소는 마음을 상징하며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 불교 선종화(禪宗畵)에 동자(童子) 스님이 ‘소를 찾아가는’ 심우도(尋牛圖)라는 그림이 있는데 혹여 그도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 소를 그리지 않았을까. 

올해 흰 소의 해에는 모두가 소처럼 맑게 두 눈을 열고 가슴 환히 헤쳤으면 좋겠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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