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사람, 장한철
애월사람, 장한철
  • 뉴제주일보
  • 승인 2021.01.0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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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신 수필가·애월문학회장

코로나19로 나들이가 줄었다. 몇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 오름 가는 일도 멈추었다. 며칠째 집콕 생활이 싫지는 않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 바다라도 만나야겠다 싶어 자주 찾는 애월(涯月) 한담 바닷가를 찾았다. 언제봐도 아름답다. 철썩거리다 촤르르 물러가는 파도 소리에 위안을 받는다. 거침없이 왔다가 미련 없이 물러가는 물결을 보며 오면 간다는 순리를 본다. 한담을 찾을 때마다 초가집 공사가 진척되는 것을 봤는데, 이제는 완전히 완성된 모습이다. 돌담 울타리 안에 안채 세 칸, 바깥채 두 칸 초가집이 얌전히 마주 보고 있다. 조선 시대 장한철이 살았던 집을 복원한 것이다.

1744년 장한철은 애월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셋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장한철이 이곳에서 책을 읽고 글공부를 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글공부하다가 가끔은 이 바다에서 멱을 감기도 하고, 한라산을 바라보며 큰 꿈을 키웠겠지. 스물다섯 살에 산방산을 오르고, 다음 해에 한라산을 올랐다고 하니 그의 기개를 짐작해볼 수 있다. 향시에 몇 차례 합격했으나, 큰 시험을 치르러 서울로 가기에는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 왔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1770, 영조 46)에 향시에서 수석으로 합격을 한 것이다. 그러자 마을 어른들과 관청에서는 노잣돈을 모아 주었다.

늘 더 넓은 세상을 동경하던 장한철은 그해 1225, 스물여덟 명을 태운 배에 오른다. 오늘처럼 바다가 잔잔했으리라. 그날도 아마 지금처럼 한라산엔 흰 눈이 쌓였으리라. 배는 아스라이 멀어지는 한 점 한라산을 보며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그러나 풍랑을 만나면서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서 떨었다. 그럴 때마다 장한철은 온갖 지혜를 짜내며 일행들을 진정시키려 한다. 난관을 헤쳐나가는 지혜에 고개가 끄덕여지고, 해풍이나 조류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하면서 일행들을 안심시키기도 한다. 배는 유구(오키나와) 열도의 무인도에까지 흘러갔다가, 지나가는 상선에 의해 구조된다. 그 후 다시 바다로 버려지고 죽을 고비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큰 산이 보이자 살려고 바다로 뛰어내린다. 허우적거리며 뭍으로 기어 올라온 곳은 청산도였다. 다음 날 살아남은 사람은 고작 여덟 명뿐임을 알고 장한철은 탄식한다.

청산도 사람들이 정성으로 보살핀 덕분에 기운을 차린 장한철은 스물한 명의 혼을 위해 제문(祭文)을 써서 제를 지낸다. 제문을 보면 그가 대단한 문장가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장한철이 청산도에서 과부와 하룻밤 밀애(密愛)를 나눈 이야기다. 전에 꿈에서 본 여인을 실제로 만나 사랑을 나눴다는 내용이다.

애월문학회에서는 장한철 <표해록>의 문헌적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장한철 <표해록>기념 전도 청소년 백일장9회째 실시하고 있다. 청산도에는 250년 전 장한철과 한 여인의 사랑을 기억하는 뜻에서 하트 모양의 개매기 체험장을 만들어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먼바다에 배 한 척이 아스라이 보인다. 저 배가 돛배라면 바람 따라 어디로 흘러갈까 잠시 상념에 젖는다.

 

뉴제주일보 기자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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