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계춘할망
나도 계춘할망
  • 뉴제주일보
  • 승인 2020.12.0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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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바다가 넓어? 하늘이 넓어?

바다가 넓지.

하늘이랑 바다랑 똑같이 가 봤어?

안 가 봐도 알아, 오래 살아 보면 저절로 알게 되어 있어.

 

영화 계춘할망은 물질을 하는 해녀 계춘할망과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손녀 혜지의 이야기다. 함께 시장에 갔다가 잃어버린 손녀가 12년 후에 찾아오면서 영화는 극의 재미를 더한다. 나도 모르게 깊숙이 빠져들면서 어느새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감동의 여운이 식을 무렵 영화의 배경이 됐던 장소들을 한 장면씩 빔을 쏘아서 보는데도 배우들이 주는 몰입감이 얼마나 컸던지 다시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눈에 익은 배경과 대사들이 여운으로 계속 맴돌면서 촬영지를 찾아 걸으며 이야기 속을 더듬어 보고 싶은 마음에 하도리 별방진으로 향했다. 해녀가 널어놓은 우뭇가사리를 모르고 밟았다가 혼이 나는 모습이 아른거린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던 공중전화가 놓여 있던 장소, 지금은 철거되고 없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 또한 친구에게 안부를 묻고 있었다.

혜지와 계춘할망이 살았던 평대리 대수굴집은 영화가 끝나고 개조를 해서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도 쪽파를 다듬던 마당과 똥돼지 또야가 살았던 돼지우리. 계춘할망과 혜지가 걸어오고 석호 삼춘이 드나들었으며 집을 팔라고 찾아오던 부동산중개인이 촐싹거리며 들어오던 굽이 진 올레길은 변함이 없다. 치매에 걸린 계춘할망이 돌담에 쌓인 눈을 쓸며 곱다하고 내게 말을 걸어올 것 같다. 가을이라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오래된 돈나무는 영화 속처럼 그 자리에서 여전히 눈을 맞으며 지나는 이들을 지켜보는 듯하다.

노름빚에 쫓겨 딸을 찾아 온 아버지가 돈을 구해달라고 하는 장면과 무슨 염치로 나를 찾아 왔냐고 되묻는 혜지의 암담했던 모습이 담긴 커피숍 바다봉봉창가에 앉아 부녀의 대화를 엿듣는다. 체조를 하던 계춘할망과 동네 사람들이 바다가 잔잔해진다며 물질하러 가버려 당황하던 체조선생의 모습도 팔각정에 남아 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먼 바당에 나가지 못하고 할망바당에서 물질하는 해녀의 모습이 눈에 뛴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지칠 때 온전한 내 편 한 사람만 있어도 된다며, “나가 너를 위해 뭐든지 해주겠다던 계춘할망. 물질로 억척스럽게 번 돈을 손녀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 주던 계춘할망이 저 바당에서 물질하고 있다. 유채꽃이 제주를 덮는 날이면 손녀 혜지의 목소리가 바람 타고 귓가에 박힐 듯하다

나에겐 할망이 바다야하늘보다 넓은 것은 끝없이 내어 주던 경이로운 바다였고, 바다보다 더 넓은 것은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 주던 할머니의 마음이었다. 내게 세상에서 가장 넓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뉴제주일보 기자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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