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날, 약속은 없지만
눈 내리는 날, 약속은 없지만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20.11.29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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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주 편집인·주필·부사장

첫눈이 오면 학교나 일터로 가지 말고 눈 오는 날의 낭만을 즐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침에 등교하고 출근을 했는데 오후에 첫눈이 오면 어떻게 되나. 다음 날에 쉰다. 북유럽의 어느 복지 국가의 얘기가 아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불과 3000달러도 되지 않지만 국민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라. 이른 바 부탄의 ‘첫눈 공휴일’ 얘기다. 

주말에 한라산에 첫눈이 온다는 기상청 예보에 ‘부탄의 첫눈 공휴일’이 생각나고 잊었던 추억들이 새롭다. 올해 첫눈은 살짝 가랑눈에 그쳤는지 한라산에는 하얗게 상고대만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그래도 괜찮다. 첫눈은 그 눈을 처음 보고 처음 맞는 사람의 ‘마음에 내리는 눈’이기 때문이다. 눈이 보일 듯 말 듯했다지만 한라산에 눈을 보러 간 사람들의 마음엔 분명 첫눈이 내렸을 것이다.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첫눈 오는 날 만나자’, 정호승)  이 시인은 이렇게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데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라고 한다. 또 이런 시도 있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첫눈’ 김용택)

첫눈엔 이처럼 약속과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첫눈이 내리면 사는 동안 풍진(風塵)에 잃어버린 아름답고 순수했던 시절이 떠오르고 팍팍하고 삭막해진 마음에 다시 한줄기 따스한 바람이 분다. 그 심풍(心風)에 젖어 가슴이 설레는 탓인지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어도 누구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은 늘 그대로다.

▲한라산 첫눈이 오더니 만추의 수은주도 코로나 19 한파만큼이나 뚝 떨어졌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바이러스 사태 속에 ‘산성 눈’이 올까 걱정이다. 대기오염으로 산성이 된 눈이 오면 눈을 맞아가면서 길을 걷는 멋도, 산길에서 눈을 뽀드득 씹어 먹는 즐거움도 사라질 것이다.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하던 어린 날의 추억 만들기도 꺼림칙해질 것은 물론이다.

올해 눈의 산성도는 얼마나 될까. 눈 내리는 날에 마스크를 쓰고 거기다가 우산까지 쓰고 다니는 풍경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해마다 대기의 오염이 더해가고 있으니 산성 눈이 내릴 가능성은 충분하다. 눈을 먹어 보면 김치의 신맛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있으니까 삼림이나 토양에는 물론 인체에도 유해할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말을 듣고 있자면 ‘첫눈 같은 세상’은 저 먼 나라 얘기인 것 같고 시인들의 눈 수사(修辭)가 우리를 속이는 것 같아 쓸쓸하다.

▲어디 말장난하는 ‘수사’는 시인들뿐이랴. 세상은 온통 거짓말을 하는 허언증(虛言症)으로 꽉 차 있다. 허언증은 자신의 거짓말을 스스로 믿어버리는 공상적 거짓말(pseudologia fantastica)증세라고 한다. 단순한 거짓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증세는 자신의 세계가 완벽하다고 믿고 타인에게 주목받으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자아도취성 성격장애의 한 특징으로 정신적 질환의 하나다. 허언증은 깊어지면 나중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게 돼 폭주한다. 문제는 그 대표적 상황이 다른 곳도 아닌 정부와 입법, 사법에서 연일 벌어지고 있으니 정말 큰 일이다.

곧 대설(大雪, 12월 7일)이다. 이 겨울에는 코로나19 사태에, 허언증 정치에 파묻혀버린 ‘첫눈과 같은 세상’을 되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눈 내리는 날, 약속은 없지만 혹시 누구와 만날지도 모르는 해안도로 ‘핫 스트리트’를 걷고 싶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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