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해결 투신 32년…역사 현장에 어김없이 그가 있었다
4·3 해결 투신 32년…역사 현장에 어김없이 그가 있었다
  • 고경호 기자
  • 승인 2020.11.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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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제주&제주인] 8. 양조훈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2003년 12월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4·3 진상규명과 희생자 및 유족들의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고 작성된 보고서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1월 11일 청와대에서 ‘제주4·3특별법’에 서명하는 사진이 실려 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바로 뒤에 서서 이를 결연히 지켜보고 있는 인물은 20년이 지난 현재 제주4·3평화재단(이하 평화재단)을 이끌며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제주인으로서 제주의 비극을 세상에 알리고 도민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온 양조훈 평화재단 이사장은 4·3에 투신한 지난 32년을 ‘운명’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했다.

■ “운명 말고는 달리 표현하기 어렵네요”

“4·3을 실제 겪었던 세대도 처음에는 4·3을 ‘제주사건’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반도 분단, 그리고 동서냉전이라는 세계사적인 사건과 (4·3이)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해왔죠.”

지난 9일 평화재단에서 만난 양 이사장은 4·3 진상규명과 완전한 해결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유를 담담하게 얘기했다.

양 이사장은 1988년 당시 제주신문의 4·3취재반장을 맡아 기획물 ‘4·3의 증언’을 보도했다. 또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을 거치며 10년 넘게 ‘4·3은 말한다’를 연재했다.

양 이사장은 4·3 기획보도를 통해 1945년 해방부터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사건 전체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양 이사장은 “4·3취재반장을 맡은 이후 32년째 이 일을 하고 있으니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달리 표현하기는 어렵다”라며 소회를 밝혔다.

그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면 양 이사장에게 4·3은 운명이었다.

27년 간 걸었던 언론의 길에서 나와 1999년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이듬해부터는 4·3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작성의 실무 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다.

또 이 보고서를 근거로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4·3에 대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2001년 뉴욕타임즈는 양 이사장을 “4·3 학살을 조사·연구해 온 저널리스트”라고 소개하면서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감춰져왔던 4·3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고, 정부로부터 사과를 이끌어냈으며, 나아가 완전한 해결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그는 ‘운명’이 가리키는 그 길을 물러서지도, 좌·우로 틀지도 않고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 “미국의 역할과 책임 문제 규명해야”

2018년 평화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여전히 4·3 진상규명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양 이사장은 “취임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학술 연구와 조사 기능이다. 그래서 취임하자마자 재단 산하에 ‘조사연구실’을 출범시켰다”고 말했다.

평화재단은 추가 진상규명을 위한 전문적인 연구와 조사를 전담하는 조사연구실을 통해 지난해 770쪽 분량의 ‘4·3추가진상보고서 제1권’을 발행했다.

해당 보고서에는 집단학살 사건과 수형인 행방불명 피해 실태, 예비검속 피해 실태, 유해 발굴 실태, 교육계 및 군인, 경찰 피해 실태 등이 담겼다.

양 이사장은 “같은 장소에서 50명 이상이 피해를 입은 집단학살 사건 26건을 밝혀냈다. 앞으로도 행방불명 희생자의 족적을 찾아 나설 예정”이라며 “제목에 ‘제1권’이라고 붙인 이유는 앞으로 ‘제2권’, ‘제3권’을 추가로 발간하겠다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양 이사장이 꾸린 조사연구실은 추가 진상조사와 함께 미국 자료 발굴과 수집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2년 전부터 미국에 조사요원을 파견한 양 이사장은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정리해 올해 말 2권 분량의 미국자료집을 펴낼 계획이다.

양 이사장은 “미국에 보관돼 있는 4·3 자료들을 발굴해야만 미국의 역할과 책임 문제를 규명할 수 있다. 이를 국제사회에서 논의하기 위해 지난해 6월 뉴욕에 있는 UN본부에서 ‘4·3 인권 심포지엄’도 개최했다”며 “당시 심포지엄 협력단체로 미국 종교계 및 시민단체 14개가 참여했다. 올해 가을에는 ‘워싱턴 4·3 심포지엄’을 개최하려했는데 코로나19로 연기돼 무척 아쉽다”고 피력했다.

■ “다음 세대에 시대정신 물려줘야”

양 이사장은 지난 12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가 주최한 4·3 공청회에 ‘진술인’으로 참석했다.

이날 양 이사장은 왜 4·3 군법회의가 불법인지, 또 과거사 해결의 정의를 위해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왜 필요한지 역설했다.

4·3 진상조사 보고서 발간에 참여했고 4·3특별법 제정, 그리고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를 이끌어 낸 그가 국회에서 진술인으로서 4·3특별법 개정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양 이사장은 “4·3특별법 개정을 지지하는 전국 각 지방의회와 교육감들의 성명이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4·3특별법 개정을 현실화하기 위한 그 열기가 더욱 뜨거워지고 있는 것”이라며 “평화재단은 4·3희생자유족회 등 관련 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올해 안에 4·3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양 이사장은 4·3 희생자 및 유족을 위한 복지사업에도 앞장서고 있다.

평화재단은 생존 희생자와 유족, 며느리 등을 대상으로 매년 30억원에 육박하는 의료지원비를 지급하고 있다.

또 올해부터 연로하신 생존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수여하는 ‘장한 어버이상’ 위로금과 유족자녀 장학금 규모를 늘렸다.

특히 지난 5월 문을 연 4·3트라우마센터를 시범 운영하면서 누적 이용객 7000명을 대상으로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4·3 평화·인권교육도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4·3평화재단이 주력하는 분야다.

양 이사장은 “암울했던 1980년대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북한공산당의 사주 아래 제주폭동사건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심히 왜곡된 내용이 버젓이 실렸다”며 “다행히 4·3에 대한 교과서 기술은 점차 변해오다가 올해부터 전국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 내용이 대폭 개선됐다. 제주도교육청 등이 사전에 선제적으로 시안을 제안했던 것이 주효해서 4·3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이란 학습요소에 편재됐다”고 얘기했다.

이어 “지난달에 개최한 4·3평화포럼의 제목을 ‘제주4·3 평화·인권교육의 기억과 전승’으로 설정한 이유도 과거사 해결을 통해 다음 세대에 역사의 가르침과 시대정신을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4·3특별법 개정에 더욱 힘 모아야”

양 이사장은 지난해 11월 아시아태평양조정포럼(APMF)이 수여하는 평화상을 수상했다.

APMF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20개국의 갈등 조정 전문가들이 참여해 다양한 갈등 이슈의 해법을 논의하고 경험을 공유하는 국제 비정부기구다.

당시 APMF는 4·3의 광풍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민들의 생명을 구한 故 문형순 전 성산포경찰서장과 4·3의 진실을 밝히고 화해운동을 벌인 양 이사장에게 평화상을 공동 수여했다.

양 이사장은 수상 소감을 통해 “국가 권력이 부당하고 불법적으로 행사됐다면 더욱 무겁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서 “아직도 ‘국가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당한 기억운동은 아직도 유효하고 계속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양 이사장은 당시 밝힌 소감을 현실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연기된 워싱턴 4·3 심포지엄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내년에는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페라 ‘순이삼춘’을 올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또 4·3의 대중화를 위해 대중영화 시나리오도 공모하고 있고, 4·3 기록물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수집·축적하기 위해 아카이브 시스템을 전면 개편할 계획이다.

양 이사장은 “도민과 유족들이 전개하고 있는 화해와 상생, 치유 운동은 이제 국내·외 학자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우리가 벌이는 화해운동이 더욱 성숙하기 위해서는 국가 권력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뜻에서 피해자 보상 등이 담긴 4·3특별법 개정안이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며 “이 일에 도민들께서 더욱 힘을 모아주시기를 당부 드린다”고 강조했다.

양 이사장이 걸어갈 남은 길도 결국은 4·3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걸어온 길을 후대가 오롯이 이어 걷는다면 4·3의 완전한 해결은 머지않은 미래에 다가올 것이다.

■ 양조훈 이사장은…

1948년 제주시 이도동에서 태어난 양조훈 이사장은 1972년 언론에 몸 담아 제주4·3을 집중 조명했다.

1988년부터 제주신문 및 제민일보 4·3취재반장을 맡아 10년 넘게 ‘4·3의 증언’, ‘4·3은 말한다’ 등의 기획물을 연속 보도했다.

1999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부터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의 진상조사팀 수석전문위원을 맡아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작성의 실무를 책임졌다.

이후 제주4·3평화재단의 초대 상임이사로 재직한 양 이사장은 2018년부터 6대·7대 이사장으로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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