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담 길은 느릿하게
밭담 길은 느릿하게
  • 뉴제주일보
  • 승인 2020.10.06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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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촉촉하게 내리는 빗방울을 맞으며 월정리 밭담 길 걷기에 나섰다. 시댁동네여서 그랬을까. 볼일 만 보고는 바로 돌아서 나오던 마을이었다. 오늘은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 마음 비우고 걸었더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게 그림 같다. 오래전에는 아침에 일어나 바당에 가서 듬북 한 짐 짊어지고 와야 아침밥을 먹는다고 할 만큼 부지런한 마을이다.

월정리가 고향이라는 세계자연유산해설사의 밭담 이야기와 살아 온 내력이 보태어져 걷는 내내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다. 늘 보던 풍경이라 무심하게 생각했는데 설명을 들으니 새삼 소중하게 다가온다. 저 멀리 여서도가 가뭇하게 보이는데 가을비는 실비가 돼 풍차와 함께 반가이 인사를 건네고 있다.

관광지로 닦아 놓은 산책길이 아닌 농부들의 길을 따라 진빌레 밭담 길을 걷는데 외담, 접담, 잡굽담, 잣담. 이름도 모양도 서로 다른 돌담이 모진 바람에도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꿋꿋하게 자리하고 있다. 척박한 땅에서 농작물과 토양을 보호하려는 선조들의 지혜와 의지를 읽는다. 태풍과 같이 휘몰아치는 바람에도 오랜 세월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지난한 세월을 묵묵히 살아 온 우리네 부모님을 보는 느낌이다.

신예리에 사는 친구네 감귤 밭에 가면 친구는 담쟁이가 붉게 물든 돌담을 은근히 자랑했다. 지금은 쌓을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설명을 덧붙이며 그 가치를 높이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때 봤던 돌담이 잡굽담이다. 다른 밭담과 달리 굽에는 작은 돌을 놓고 그 위에 큰 돌을 올려 쌓는 독특한 형식이다. 개간한 농지에서 연접한 땅과의 높낮이 때문에 생기는 토양 유실을 방지하려는 지혜가 담겨 있다고 한다.

제주 밭담은 자리한 장소의 특성에 맞추어 적절히 쌓기 때문에 모양새나 형식이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 산소는 소박하게 외담을 둘렀으나 겹으로 쌓은 잣담 혹은 잣벡담은 크고 작은 돌멩이로 성담마냥 넓게 겹쌓았다. 경작할 때마다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자갈을 치워내는 과정에서 생겨난 유형이라고 한다. 도로에 인접한 밭의 안쪽에 맹지 밭이 자리한 경우 잣담을 일부러 그곳까지 닿도록 쌓아 맹지 밭에서 농사짓는 이웃이 잣담 위를 걸어 드나들 수 있게 했다는 데서 선인들의 인정을 느낄 수 있었다.

농로를 따라 걸으며 친구들과 함께 가을을 맞이한다. 몇 번의 태풍이 지나갔음에도 당근과 쪽파, 콩이 자라고 있었으며 닭의장풀과 칡꽃이 무더기로 피어 지나는 우리에게 손을 흔든다. 아주 천천히 손으로 만져 보면서 돌이 건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구불구불 흑룡만리 밭담 길을 걸으니 어릴 적 풍경이 떠오른다. 돌아가신 이모는 살아 계실 적에 옆집에 사셨는데 늦은 밤 울담 너머로 제사 음식을 건네주곤 하셨다. 그 울담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속내를 주고받던 이모의 나직한 음성이 그립다. 가난 속에서도 정을 나누며 살아오신 어른들의 삶은 돌담만큼 무겁고 고단하면서도 정겨운 풍경이었다.

뉴제주일보 기자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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