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트라우마
  • 고경호 기자
  • 승인 2020.09.1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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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의식 속에 저장된다.

어떤 경험이나 인상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다시 생각해 내는 게 기억이다.

추억으로 남은 장면, 좋아하는 음식의 냄새, 즐겨듣는 음악 등 감각 기관을 통해 생성된 좋은 기억들은 다양한 감정의 원천이 된다.

나쁜 기억들은 의식 속에 각인된다.

과거에 경험했던 위기나 공포들은 비슷한 상황에 처해질 때마다 기억을 통해 발현된다.

이 때 느껴지는 심리적 불안이 트라우마다.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흐려지지만 트라우마는 의식에 새겨진 채 좀처럼 흐려지지 않는다.

한 세기를 살아온 백발의 노인이 그랬다.

지난 14일 제주지방법원 재판정에 선 현경아 할머니(100)는 70년이나 지난 그 때의 비극을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그는 4·3의 광풍에 남편을 잃었고, 집도, 돈도, 먹을 것도 없이 힘들게 자녀들을 키웠다.

그가 4·3의 비극으로 점철된 삶을 서럽게 토해내자 재판장 곳곳에서 깊은 탄식과 울음이 터져 나왔다. 특히나 더욱 슬픈 건 그때의 장면과 기억들을 잊지 못한 채 70년 넘게 간직해왔다는 것이다.

뒤이어 법정에 선 김을생 할머니도 4·3 당시 잃어버린 아버지, 개머리판에 두들겨 맞고 전기고문까지 당했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재판부를 향해 “관 속에 골이 없다”고 울부짖었다.

이들은 남편과 아버지, 형이 억울하게 설 수밖에 없었던 서슬 퍼런 재판정에 70여년 만에 대신 섰다.

그 때의 재판부는 징역형을 내렸지만 지금의 재판부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4·3특별법 개정안이 다시 21대 국회 문턱에 섰다.

당시의 불법 군사재판을 무효화하고,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정부의 배·보상 등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과제들이 개정안에 담겨 있다.

4·3특별법 개정을 통해 한 세기를 살아도 지워지지 않는 희생자와 유족들의 트라우마를 이제라도 위로해야 한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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