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은 가득차면 기운다'는데
'해와 달은 가득차면 기운다'는데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20.08.2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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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르 황….”(天地玄黃 宇宙洪荒, 하늘은 검고 대지는 누르나니 우주는 얼마나 넓고 거친가)
한자 입문의 초급 교과서인 천자문의 도입부는 이렇게 웅대하다.

부끄럽지만 나는 7세 아이가 다 외운다는 이 천자문을 대학 3학년이 돼서 뗐다. 전공 필수인 한문 과목에서 죽을 쑤는 나를 보고 선배가 조언해준 대로 이 천자문을 들고 밤낮으로 외웠다.

천자문은 고대 동양의 대(大) 서사시라 할 만하다. 하늘과 땅에서 시작하는 이 서사문은 음양과 계절, 우주의 변화를 노래한다. 천지인(天地人)을, 때로는 시공(時空)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철학을 담고 있다.

천자문을 읽으면서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해와 달은 가득 차면 기울고 별자리는 (태고적부터) 저렇게 넓게 펼쳐져 있도다. 찬 계절이 오면 더위(暑)는 물러난다’는 대목이다.(日月盈 辰宿列張 寒來暑往)

▲더위만큼 다양한 인문학적 표현도 없으리라.

시기별로 첫 더위·일 더위·늦더위, 주야에 따라 낮 더위·밤 더위, 습기 유무에 따라 무더위·강더위로 나눴다. 초·중·말복 시즌에는 삼복더위·복더위 또는 복달더위라 하고 심하면 된 더위·불볕더위라 했으니 그 체감형은 가마솥 더위나 찜통 더위다.

그 끝에 살인적 더위 같은 극단적 표현이 나왔고, 폭염주의보와 경보, 열대야라는 행정 용어들이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언어학자들은 이 폭염(暴炎)을 ‘불볕 더위’란 말로 순화했지만 불더위까지 순치시키진 못 했다.

윤동주가 시 ‘창공’에서 그 여름날의 더위를 ‘끓는 태양’이라 했듯이 지난여름은 정말 지글지글 끓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무더운 한 여름을 ‘개의 계절’로 부른다. 밤하늘에 개 모양의 별이 나타나면서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엉뚱한 짓을 한다고 해서다.

지난 여름. 우리 사회에도 엉뚱한 일들이 참 많았다.

▲그 엉뚱한 여름이 가고 이제 ‘찬 계절’이 오는 걸까. 하늘이 높아지면서 구름 모양도 완연히 달라졌다.

절기의 변화는 참으로 오묘해서 어제는 처서(處署, 23일). 여름 더위가 물러나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고 보니 덥다고 아우성을 치며 열대야에 시달리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서귀포시에 있는 정방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벌써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듯하다. 등산객의 옷차림도 어느새 울긋불긋하게 변했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의 입도 비뚤어져 잠자리도 한결 나아진다고 하니 오랜만의 편안함이 아닐까 싶다.

▲더위와 서늘함을 염량(炎凉)이라던가. 세력의 성함과 쇠함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선악과 시비를 분별하는 슬기를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 세력이 있을 때는 아첨해 따르고 그게 없어지면 푸대접하는 세상인심을 비유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하지만 우리 심사를 더 어지럽히는 건 정치·사회혼란이다. 전공의 무기한 파업 등으로 어수선한 판에 코로나19사태는 째깍째깍 광화문발 ‘시한폭탄’이 터졌다. 정치권은 나라살림이야 거덜 나든 말든 포퓰리즘 경쟁을 벌이며 표 계산에만 몰두하고 있다.

‘해와 달은 가득 차면 기운다’고 하는 데 이 정치권은 뻣뻣하게 목을 세우고 서로 네 탓이라고만 한다. 머지않아 날씨는 더 선선해지겠지만 답답한 가슴은 언제 풀릴지 기약도 어렵게 됐다.

다행히 앞으로 큰 더위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부디 가을철 시원한 바람처럼 우리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러 일들이 뒤숭숭해서인지 더위가 돌아갔다는 ‘처서’가 올해는 유난히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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