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거두 손 거친 '찐' 독립운동가 자서전 아이러니
친일 거두 손 거친 '찐' 독립운동가 자서전 아이러니
  • 뉴제주일보
  • 승인 2020.07.1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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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集文堂 1994년)

우리 책방에 소장된 책들 가운데 같은 책이지만 출판된 시기는 달라도 수록된 내용은 같은 게 대부분이다.

한 저자가 이전에 발표한 작품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일부 표현이나 내용을 수정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리 흔하지는 않은 까닭이다.

물론 문학작품의 경우에는 그런 변화가 없는 게 당연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 스스로 수정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한 분야의 자칭 타칭 권위자로 인정받는 사람의 저작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한 걸 보면, 그 분야의 보수적인 풍토와도 관련성이 높다 하겠다.

학창시절 많이 느꼈던 부분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이 자신의 견해나 작품을 비평할 때 그걸 기꺼이 수용하고 반영하는 분들은 보기 드물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쩌다 그런 분을 만나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샘솟는 경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쉽지 않은 길을 걷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원래 원본은 하나지만 출판되는 시기나 편집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거나 이해되어 나오는 책마다 내용이 다른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그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원본의 중요성이 아주 높다고 하겠다.

요즘도 독자들이 꾸준히 찾는 책 가운데 하나인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도 그런 경우이다. 육필 원고를 쉽게 접할 수 없던 시절 책으로는 1947년 국사원(國士院)에서 처음 출판됐다.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은 김지림과 김흥두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하나, 백범의 둘째 아들인 김신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춘원 이광수의 윤문(潤文)을 거쳤다고 한다.

요즘 말로 ‘찐’ 독립운동가의 자서전을 ‘찐’ 친일 문학의 거두가 윤문했다는 아이러니도 그렇고, 이렇든 저렇든 간에 당대 명문장가의 손길을 거치다 보니 문장이 너무 유려해지고 또한 삭제된 내용도 많아져 원본과 다른 부분이 많았다.

원본이 공개되기 전이라 이후 출판된 다른 출판사의 책들은 모두 이 ‘국사원본’을 저본(底本)으로 할 수 밖에 없다보니 독자들은 한동안 원본과는 많이 다른 걸 읽을 수밖에 없었다.

(敎文社 1979년판 등) 1989년 ‘새 원본 발견!’이라는 슬로건으로 서문당에서 발간된 책 또한 수록된 내용은 ‘국사원본’에 비해 많았지만 저본이 또 다른 필사본이라서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이 해소될 수 있었던 것은 김신 장군이 소장하고 있던 육필원고가 1994년 '친필(親筆)을 원색영인(原色影印)한 김구자서전 백범일지'(集文堂)라는 이름으로 간행된 이후이다.

이 책이 출판된 후 그간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누구나 쉽게 비교 대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범 특유의 글씨체로 쓰인 까닭에 원본을 읽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육필원고는 1997년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백범기념관에서 보관 중이다.

요즘에는 백범연구자인 도진순 교수의 '백범일지'(돌베개 2002 개정판)를 찾는 분들이 많다.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주해본(註解本)으로 사진 등 많은 도판자료가 포함되어 있어서 보다 이해하기 쉽고, 이젠 어느 거두의 유려한 문장으로 윤문하고 삭제한 책과 그 아류보다 원문에 충실한 '백범일지'가 보고 싶은 독자들이 많아진 까닭이리라. 감사한 일이다.

뉴제주일보 기자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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