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丹齋)의 인간적 면모.역사 대하는 학문적 태도 파악
단재(丹齋)의 인간적 면모.역사 대하는 학문적 태도 파악
  • 뉴제주일보
  • 승인 2020.06.1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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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연구초(硏學社, 1946년)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硏學사, 1946) 표지.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硏學사, 1946) 표지.

몇 년 전 다른 판본에 비해 우수한 판본을 말하는 선본(善本)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 때 인용했던 장지동(張之洞)이 내린 선본의 첫 번째 정의는 족본(足本)이었다. 즉 빠지거나 삭제한 부분이 없는 책을 말한다. 그는 초학자(初學者)가 책을 살 때는 선본을 택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본지 2016년 12월 9일자 8면 참조)

최근 사학과 새내기 시절 읽었던 문고판의 원본에 가까운 책을 입수하고 나서 그가 내린 정의가 왜 중요한지, 왜 선본을 택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느꼈다. 그 책을 문고판으로 읽을 당시에는 왜 그런 제목이 붙었는지, 왜 서문이 없는 지 등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읽고 싶은 글이 실려 있으니 그 내용만 파악하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 책이 바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의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硏學社 1946)이다. 이 책은 원래 1920년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선생의 우리 고대사 관련 글 6편을 묶어 1929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했던 책을 해방 후에 다시 출판한 것이다.

필자가 읽었던 책은 1974년 처음 간행된 문고판 '한국사연구초(韓國史硏究草)'(을유문화사)의 1984년 3판본이다.

1946년판 책에는 조선의 3대 천재 중 하나로 유명한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서(序)가 온전히 실렸는데 문고본에는 이 서문이 빠져있다. 모두가 다 아는 소설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었지만 해방 이후 월북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우리가 사는 이 공간에서는 늘 그늘 속에 가려져 있었던 까닭이다.

1926년에 쓴 벽초의 서문을 통해 문고판에서는 알 수 없었던 단재의 인간적인 면모와 역사를 대하는 그의 학문적인 태도를 파악할 수 있다.

벽초에 따르면 신문에 이 글들을 싣게 된 계기가 물론 친구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당시 중국 망명 중이던 단재가 ‘약간의 원고료를 얻어’ 어린 아들 수범(秀凡)의 양육비에 보태려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비록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일점혈육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이 글들을 책으로 묶어 출판하겠다는 벽초에게 그 내용에 단재 스스로가 불만족한 부분이 많다며 수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하지만 힘들게 허가를 받은 터에 시일을 끌다보면 아예 출판을 못할 수도 있어 일단 발간부터 하고 나중에 수정하자는 벽초의 제안에 단재는 한 발 더 나아가 스스로 ‘경솔히 쓴 것이 후회’된다며 출판을 중지하자고 했다고 한다. 학문을 대하는 단재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느껴지시는가.

이에 자신의 연구에 늘 불만을 느끼는 단재를 아는 벽초가 그의 연구 성과를 ‘매몰(埋沒)치 아니하’고자 ‘불만을 참으라 초하는 것을 중지(中止)하지 말라’며 출판을 강행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물론 이 책에서 단재의 연구 성과인 6편의 글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서문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따로 있다. 시대의 논리로 재단된 책보단 역시 온전한 게 좋다.

이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서(署)까지 온전한 1929년 초판 '초(草)'가 보고 싶다. 욕심엔 한이 없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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