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서신’
‘옥중서신’
  • 뉴제주일보
  • 승인 2020.04.1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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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한국의 메이저 신문 중 하나는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의 말을 인용해 보수단체의 광고를 연일 내보낸다. 

그 광고를 유심히 본 독자는 “참으로 인용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투덜거릴 수 있겠다.

‘옥중서신’(Captivity Epistles)으로 유명한 사람은 독일의 사제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다. 

그는 반나치 지하조직을 결성해 히틀러 암살을 도모했다. 그렇지만 게슈타포에 체포돼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옥중서신’은 바로 본회퍼가 당국에 체포돼 처형되기까지의 투옥 시절에 쓴 신앙고백적인 편지의 모음이다.

얼마 전 우리 역사에 ‘옥중서신’이 또 하나 추가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측근 변호인을 통해 흘려보낸 글이다. 총선을 앞두고 보수 세력의 일대 결집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처음 탄핵된 대통령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성찰 대신 현실 정치인으로서 잔광(殘光)을 뿌리면서 훗날을 기약하는 정치 행위를 재개한 것이다.

그렇지만 박근혜의 ‘옥중서신’은 사람들을 참으로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신에서 총선을 앞두고 보수야권의 단일대오를 촉구했다. 감옥에서까지 총선 지침을 내리고 적극적으로 선거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본회퍼와 박근혜의 ‘옥중서신’은 그 결이 처음부터 달랐다. 

본회퍼가 바라본 당시의 독일 상황은 어떠했는가? 그는 ‘마치 어떤 미친 사람이 대로로 차를 몰고 간다면 나는 목사로서 그 미친 차량에 사고를 당한 사람의 장례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만일 내가 그 현장을 목격했다면 그 미친 사람으로부터 핸들을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을 하고 있다.

박근혜의 메시지는 태극기 세력을 향해 야당을 중심으로 단결하라고 주문한 것으로 읽힌다. 결국 이 세력, 저 세력을 다 합쳐 ‘도로 친박당’, ‘도로 새누리당’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냥 한풀이로 생각하고 넘어가기엔 기가 막힌 망동(妄動)이요, 아직도 자신이 감옥에 왜 갇혀 있는지 모르는 한심한 작태다. 국정농단에 이어 또 새로운 국기문란 행위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김대중의 ‘옥중서신’과 김지하나 김남주의 ‘옥중시(詩)’가 있다. 감옥보다 더 어두운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에게 역설적 광휘를 선사해 준 사례들이다. 김남주는 1979년 남민전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돼 만 10년 만에 풀려나온 ‘옥중시인’의 대명사다.

‘옥중서신’의 역사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한 번쯤 물어야 한다. 박근혜는 정의로운 싸움을 하다가 옥에 갇혔는가? 박근혜는 부당하게 박해받는 저항 인사인가?

어쨌든 ‘옥중서신’의 역사는 오명 하나를 기록하게 됐다. 박근혜의 ‘옥중서신’은 정의로운 약자도 아니고 탄압받는 소수자도 아닌 스스로 탄핵을 불러온 실패한 정치인이 다시 지지 세력 결집을 유도한 정치적 포고문이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왜 갇혔던가?

본회퍼는 나치스에 저항하고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웠다가 체포돼 사형당한 분이다. 당시 독일은 히틀러를 옹호하는 교회와 하느님 중심을 부르짖은 교회로 분열돼 있었다. 본회퍼는 후자인 ‘고백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로서 신앙의 양심을 지켜 스위스 국경을 넘는 많은 유대인에게 도움을 줬고 2차 세계대전의 참상과 독일 교회의 현실을 알리는 운동을 지속했다.

일련의 저항, 체포, 죽음의 과정에서 본회퍼는 자신의 생각을 ‘옥중서신’의 형태로 남겨뒀는데 인간의 한계가 곧 신(神)의 역사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믿음으로 불의에 저항했던 그는 종전을 불과 몇 달 앞두고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은 본회퍼의 길이 ‘옥중서신’에 적힌 대로 ‘낮아짐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기는 하지만 사랑과 용서의 길’이었음을 깊은 감동으로 알게 됐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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