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흐드러진 4월…그날의 아픔 되새기며 걷는 길
동백꽃 흐드러진 4월…그날의 아픔 되새기며 걷는 길
  • 장혜연 기자
  • 승인 2020.03.30 1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 제주 조천 북촌마을 4·3길-2

금기시 됐던 ‘4·3’ 깨트린 ‘순이삼촌’
기념관 옆 옴팡밭에 ‘문학비’ 조성
서우봉 학살터 몬주기알 아픔 간직
가릿당·등명대 등 역사·문화 유적 눈길
순이삼촌 문학비.
순이삼촌 문학비.

이제 곧 4월이 다가오는데도 코로나19의 영향인지 이곳 43길에선 사람 구경하기조차 힘들다. 그래도 오늘 걷는 코스가 올레 19코스와 대부분 겹쳐 있어 가뭄에 콩 나듯 몇 분 만났을 뿐이다.

 

■ 현기영의 순이삼촌비

현기영 선생
현기영 선생

너븐숭이 43기념관 전시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아무도 말 못 하던 시절, 문학적 양심으로 고향의 아픈 역사에 대해 펜대를 들이댄 작가가 현기영이었다. 그는 북촌리의 4·3을 다룬 작품 순이삼촌1978창작과 비평가을호에 발표하면서 침묵의 금기를 깨고 논의의 한복판으로 끌어내었다. 그러나 작가는 4·3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리고 이 작품 발표 30주년을 맞아 제주작가통권22호에 실었던 작가와의 대담내용 일부를 덧붙였다.

한 공동체가 멜싸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말이야. 이념적인 건 문제가 아니야. 거기에 왜 붉은 색을 칠하려고 해? 공동체가 무너지고, 누이가 능욕당하고, 재산을 약탈당하고,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친구가 고문당하고, 씨 멸족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항쟁이란 당연한 거야.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항복하고 굴복해야 하나? 이길 수 없는 싸움도 싸우는 게 인간이란 거지.’

이렇듯 현기영 선생의 소설 순이삼촌은 금기시 해왔던 ‘43’이란 화두를 이 땅 위에 끌어냈고 아직 완전한 해결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결국 특별법과 진상조사를 통해 오늘의 자리로 이끄는 물꼬 역할을 했다. 문학비는 그의 작품에서 비극의 한 장소로 묘사했던 옴팡밭에다 내용 중 주요 부분을 스크랩하듯 돌에 새겨 디자인해 놓았다.

 

서우봉 일제 진지동굴.
서우봉 일제 진지동굴.

■ 비극의 현장, 서우봉으로

서우봉은 서모봉이라고도 하며 완만한 등성이가 크게 남봉과 북봉 두 부분으로 이뤄진 원추형 화산체로 함덕리와 북촌리의 경계를 이룬다. 급경사인 북사면 기슭에 일제강점기에 파놓은 진지동굴들이 남아 있다.

해동마을을 지나 아치형 출입구가 보이는 포구를 바라보며 진지동굴로 향한다. 갯강활이 유난히 커다란 잎을 벌리고 그 사이 갯무는 자줏빛 꽃을 피웠다. 붉고 커다란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들어가 보니 까마귀쪽나무와 우묵사스레피나무 등이 얽혀 터널을 이루었다.

잠시 후 등록문화재 제309호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란 표지판과 함께 동굴진지가 나타난다. 화산 퇴적물을 뚫어 세 개의 굴을 연결한 ()’자형 구조다. 이 오름의 시설물들은 대부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연합군 함대를 향해 자살폭파 공격을 위해 구축한 것들이다. 거기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굴이 있고 그 옆으로 해안절벽 속칭 몬주기알이 이어지는데 이곳이 43 당시 북촌과 함덕 주민들이 희생된 곳이라 한다.

북촌환해장성.
북촌환해장성.

■ 북촌환해장성 가는 길

굴에서 나와 북촌환해장성으로 향했다. 해동포구의 아치형 다리를 지나면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에서 어떻게 그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납득이 안 됐다. 골목 담벼락엔 예쁜 동백꽃들이 그려져 있다.

이 곳 해동마을은 북촌리 7개 자연부락 중의 하나로 서우봉 기슭에 터전을 이룬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골목을 지나자 바다가 보이고 남쪽 해동마을 표지석 옆으로 검섯개물을 복원해 놓았다. 예전에 용출량이 많아 주민들이 식수 및 빨래터로 이용했다는데 일제 진지동굴을 구축할 때 일본군 대장이 마셨다 해 장군물이라 불린다고 덧붙인 내용이 고소를 금치 못 한다. 조금 지나 환해장성이 이어지는데 무너지다 남아있는 성은 약 150m 정도나 될까.

북촌 본향당인 ‘가릿당’.
북촌 본향당인 ‘가릿당’.

■ 다려도, 그리고 가릿당과 등명대

작은 언덕으로 이어진 동네를 지나니 눈앞에 다려도가 나타난다. 포구에서 약 400m 정도 떨어진 이 무인도는 3, 4개의 바위로 이루어졌는데 천연기념물 제327호 원앙의 도래지로 해마다 겨울에 수백, 수천 마리가 찾아든다고 한다. 2009년 제주시가 선정한 비경 31중 하나로 특히 이 섬을 배경으로 한 일몰이 유명하다.

가릿당은 구짓머루당이라고도 불리며 북촌리의 본향당이다. 당신(堂神)은 구짓모루 노보름한집이고 계단 위에 마련된 제단의 신은 구짓모루 용녀부인으로 주민들의 생사와 물고 호적을 담당한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 구짓모루에 있는 시멘트와 돌의 구조물은 등명대다. 바다에 나간 고기잡이배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1915년에 마을사람들이 세웠다는데 한쪽 귀퉁이에 세운 표석에는 당시 군인들의 총탄자국이 선명하다.

이처럼 43과 직접 연관이 없는 곳을 이어놓은 것은 지나는 길에 자리한 이 고장의 역사문화유적에도 관심을 두었으면하는 지역주민들의 바람이리라.

북촌포구.
북촌포구.

■ 북촌포구, 4·3 역사의 현장

지금은 포구가 방파제로부터 안 쪽까지 2, 3중으로 돼 있지만 43 당시만 해도 돌로 쌓은 방파제로 둘러싸인 조그만 포구였다. 194861611시쯤 우도를 출발해 제주읍내로 가던 어선이 심한 풍랑 때문에 이곳 북촌포구로 긴급 피난했다. 이 배에는 우도지서 주임 양태수(梁泰秀) 경사와 진남호(陳南豪) 순경 등 15명이 타고 있었는데 두 경찰관이 무장대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나 배들을 매어놓은 포구 안은 평온하기만 하다. 난리가 끝난 뒤 마을의 어머니들은 다행히 다려도와 주변 어장이 있어 물질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를 증명하듯 세워놓은 해녀상받침돌에 이 고장 출신 황요범 선생의 시를 새겼다.

실오라기 명줄 저승길에 걸어두고/ 한 뼘의 가슴으로 열 길 물속 후벼내어/ 엄마품의 생을 캔다./ 바위틈의 삶을 캔다.’는 등 구구절절이 절창이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장혜연 기자  jhyxs1@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