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민선지사 강성익의 혜안
첫 민선지사 강성익의 혜안
  • 김종배 상임 논설고문
  • 승인 2016.03.1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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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이 한 달 남았다. 바짝 타들어 가는 것은 후보자와 그 가족들 가슴 뿐이다.

아무리 발로 뛰어도 유권자들의 반응은 냉랭하다.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을 뿐더러 좀체 달아오를 기색이 없다. 후보자들은 신문에 동정을 알리는 게 고작이다.

어렵게 발굴한 공약도 모두 고만고만한 내용들이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관심을 확 끌어당길 대형 폭탄을 터뜨리고 싶으나 그럴만한 사안도 없다.

현실 역시 녹록하지 않다. 후탈과 공약(空約)이 문제될 수 있다. 사회 의식이 이전하고 다르다는 반증이다.

유권자들은 내색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잣대로 찬찬히 검증하고 있다. 후보자들만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산남의 낙선거사

첫 민선(民選) 제주도지사이자 제11대 지사였던 강성익. 그는 그런 면에서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많은 세월이 지났기 때문이리라.

강성익은 만년 낙선거사(落選居士)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국회의원 선거에서 세 번이나 떨어진 특이한 이력의 인물이었다. 심지어 도지사 선거가 있기 불과 5개월 전에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된 경력도 가졌다.

당시의 평균 수명을 훨씬 넘긴 70세 고령에다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된 것이어서 제주도민들은 경악했다.

 

첫 민선 지사 선거는 1960년 12월 29일에 실시됐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로 치러진 선거였다. 제주 사회의 관심은 뜨거웠다. 현직 김선옥 지사와 양제박 전 도지사를 비롯해서 김영진 적십자사제주지사장 등 5명이 출마했다.

그런데 투표 전날부터 제주지역에는 엄청난 폭설이 몰아 닥쳤다. 모든 전기와 전화가 끊기고 차량 운행이 중단됐다. 어찌어찌 투표는 마쳤지만 다음 날인 12월 30일 오전에야 투표함을 열 수 있었다. 개표는 해를 넘긴 1961년 1월 2일 오전 0시45분에 끝났다. 산남 출신의 무소속 그리고 낙선거사, 70세의 강성익이 당선됐다.

시중은 온통 이변을 일으킨 ‘서귀포 康하르방’ 얘기였다. 그때 강성익이가 내건 공약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100만명 인구가 상주하는 ‘大제주건설’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루 반나절이나 걸리던 제주~부산~서울간 연륙시간을 13시간으로 단축하고, 제주~완도 간에 1000t급 대형선박과 쾌속선 취항, 한라산 나선형 차도(車道) 개설 등을 약속했다.

그 당시로서는 거의 공약(空約) 수준의 공약이었다. 그러나 먹혔다.

산북의 박종실과 더불어 산남의 대표적 부호였던 강성익은 남의 재물을 탐낼 일이 없고, 나이가 많아 남한테 아부할 일도 없다는 주장이 이목을 집중시켰다.

‘민주’, ‘혁명’ 공약에 식상했던 유권자들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산남의 자존심과 강씨 집안의 몰표가 당선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었다.

 

大제주건설의 공약

1961년 새해 벽두 폭설만큼 돌풍을 일으켰던 강성익은 취임 4개월만에 5·16군사 쿠데타로 뜻을 접어야 했다.

인구 30만명에 불과하던 제주도를 100만명이 사는 도시로 건설하겠다던 강성익의 야심찬 공약은 뜻을 접어야 했다. 무소속의 강석익을 사사건건 시비하던 제주도의회도 나중 그의 ‘大제주건설’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공약이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20대 총선과 18대 대선을 치르면서 숱한 공약들을 접하고 있다. 실천된 공약도 있었고, 식언(食言)한 공약도 있었다.

후보자는 당선증을 받는 순간부터 언행(言行)이 달라진다고 한다. 누가 준 표인지 잊어버린 결과이다.

왜 그럴까. 자신의 명예욕과 허세를 위해 출마했기에 그렇다.

제주의 미래를 위해 한 몸을 헌신하겠다던 강성익 같은 선지자적 자세를 지닌 후보 한 사람이 아쉽다.

김종배 상임 논설고문  jongbae1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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