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가는 길'
'벌초 가는 길'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9.08.25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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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에 시달리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절기의 변화는 참으로 오묘하다.
처서(處暑)가 지나면 날씨가 마법처럼 선선해진다고 해서 ‘처서 매직’이라는 말도 생겨났다고 한다.
올레길에 피기 시작한 코스모스는 벌써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듯하다.
하늘이 높아지면서 구름 모양도 완연히 달라졌고 올레꾼들의 옷차림도 어느 새 울긋불긋하게 변했다.
하지만 아직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이르다. 한낮에는 최고 기온이 30℃를 넘나들고 있으니까.
처서는 가을을 알린다고 하는 입추(立秋)와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白露) 사이에 끼어 있는 24절기 중 하나다.
이때부터는 풀들이 더 이상 자라지 않거나 자란다 해도 그 정도가 고만고만할 것이다. ‘벌초 시즌’이 열리는 이유이다.
▲흔히 ‘처서’를 한자 뜻 그대로 ‘더운 곳’, ‘더운 때’로 풀이한다.
처(處)는 ‘곳’ 또는 ‘때’의 의미이고 서(暑)는 ‘덥다’는 의미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면 글 읽는 재미가 없을 것이다.
‘처’라는 한자의 의미에는 ‘쉬다’, ‘정착하다’, ‘머무르다’의 뜻이 있고 ‘서’라는 한자에는 ‘여름’이란 뜻도 있다. 그러니 ‘처서’는 ‘더움이 쉰다’. ‘여름이 정착한다’. ‘여름이 머무른다’의 뜻이 된다.
곧 ‘여름이 더 이상 가지 못 하고 이제 지쳐가기 시작한다’의 뜻인 셈이다.
우리 선인들은 참 지혜롭다. 숨기고 숨겨서 그 깊음을 헤아려 보아야만이 그 뜻과 맛을 알게 했으니 말이다.
초록이 지치면 단풍이 든다고 하는데. 우리도 이제 처서를 보냈으니 쉬고 머무르며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때다.
▲모든 의례는 ‘의미를 만들어 내는 기제’다. ‘의례의 부재’는 ‘의미의 부재’가 된다. 인생이 출생에서 죽음까지 전 단계에 통과의례가 빼곡한 이유다.
추석 전에 조상 묘에 무성하게 자라난 풀과 잡초를 제거하는 ‘벌초 행사’도 우리의 중요한 의례이고 깊은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처서 때쯤이면 50대 이상 중․노년층은 물론이고 20~40대 젊은 층과 어린 학생들까지 벌초 길에 줄줄이 동행하는 풍경이 낯설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대행업자에게 벌초를 맡기는 사람들이 상당수다. 점차 도시화되면서 사람들이 평소 벌초를 해본 일이 없는 데다가 자칫 무리하게 벌초에 나섰다가 사고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벌초 대행 문화를 확산시키는 것 같다.
문제는 비용이다. 올해는 최저임금인상 여파가 여기까지 미쳐선지 벌초 대행비용은 부르는 게 값이다. 산소 한자리를 벌초하는 데 최소 15만원에서 많게는 20~30만원을 요구한다.
서너자리를 맡기려면 50만원 이상 든다니까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벌초 문화는 오래되지 않았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시대에는 화장(火葬)이 주류였으니 당연히 벌초 문화도 없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적 세계관이 득세해 16세기부터 매장(埋葬) 제도가 확산되니 벌초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어제 벌초를 가봤더니 모두가 벌초 걱정뿐이다. 벌써 봉분 대신 납골당으로 조성하는 사람이 많고 화장도 늘고 있다. 오래지 않아 벌초 풍경도 사라질 게 분명하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을 뒤로 하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
할아버지와 벌초 길에 나섰던 옛 생각에 먼 산을 다시 뒤돌아 봤다. 
올 벌초 길에는 지난여름 내내 ‘정치 더위’ 먹은 사람이 많아서인지 유난히도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이 많았다.
부디 오는 가을엔 나라의 사정도 시원한 바람처럼 선선하게 풀려서 사람들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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