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었다는 사실
늙었다는 사실
  • 제주일보
  • 승인 2019.07.16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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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훈식 시인

화장실에 가면 슬그머니 거울을 본다. 어느새 눈에 익은 노인 얼굴이 있어 스스로를 눈여겨본다.

제주도 속담에 사람 얼굴을 빗대어 ᄇᆞᆯ라븐 쉐똥, ᄈᆞᆯ아먹단 볼레쭈시라는 말이 있다. 쇠똥인데 밟은 쇠똥이니 볼품이 형편없을 것이고, 단물을 다 빨아먹다가 남은 보리수 열매찌꺼기니 형상 또한 얼마나 초라할 것인가.

거울 속에 내 나이 팔십이나 구십의 얼굴을 그릴 수가 있는가? 지금 칠십대 중반이므로 동갑내기들이 더불어 부지런히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과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가 생로병사를 겪어야 한다는 통과의례도 익히 알고 있긴 하다. 아직도 건강을 지키고 있는 칠순과 병으로 고군분투하는 칠순의 확연한 차이가 부럽긴 하다. 하지만 세월의 산사태에선 모두가, 모든 것이 재난이다.

왕년의 영화배우의 젊은 시절과 노년시절로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도무지 인간의 모습이 아닌 것만 같아 영화 장면만으로도 황홀감을 선물했던 에리자베스테일러지나롤로 부리지다’, ‘오드리햅번의 늙은 사진을 보았다. 세월의 무상을 절감하면서도 비록 늙어버린 파충류 형상이지만 장수하여 노년의 모습이 있음에 그나마 위로를 받음인가. 영화 태양은 기득히에서 개성적인 연기를 보여준 세기의 미남배우 아랑드롱’, 명배우폴 뉴만’, 월리암 와일러의 명작 밴허에서 열연한 찰튼 헤스톤도 팔순을 넘긴 얼굴을 남겼다. 그 시절, 고등학생이었던 나도 노인이라니 인생이 무상할 뿐이다.

그래서인가, 늙었다는 말을 할 때부터 이미 늙었다는 사실이다. 듣기가 거북하므로 되도록 피해야 한다. 나도 왕년에는 복근에 왕자가 있었다. 지금은 무리하면 탈장할 염려가 있어 초라하게 몸을 아껴야 한다. 하지만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청춘이고 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 청춘이다.

오전에 외출하려고 지하주차장으로 갔을 때 구석진 곳에 들 고양이가 있어 무심히 보았더니 쥐를 눈앞에 놓고 장난감 취급하면서 놀고 있다. 쥐에겐 생사가 걸린 상황이라 난감하지만 그냥 모른 척하고 말았다. 거미가 밤늦게까지 거미줄을 치고 새벽이슬을 맞아가며 아침에 매미가 걸렸다는 한사(漢詩)에서, 칠년을 땅 속에서 살다가 지상에서 겨우 일주일 남짓을 살 매미를 가엾이 여겨, 살려주면 거미에게 해가 될 것이고, 그냥 모른 척 하면 매미가 죽을 것이니 진퇴양난이라는 성어(成語)도 알고 있다. 다만 이런 일에 신경을 쓴다는 자체가 노년의 일자리라도 구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어려운 처지임에도 철딱서니 없음을 까발리는 행태다. 늙었기에 안다는 구실로는 개미나 매미나 먹을 것을 구해야만 하는 피동이 뼈저리게 아플 뿐이다. 살기 위하여 다는 생명을 잡아먹어야 하는 결핍이 억울하지만 이 또한 모른 척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긍정이 곧 늙었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에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모자란 부분이 많았다고 미안함을 넌지시 일렀더니, 그냥 건강하게 사십시오.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각고의 땀을 흘리는 것은 모질게 아파도 그리저리 견디지만 다 이루어 놓고 대우받으려는데 위독해서 병원에 누워있으면 그땐 정말 낭패니까 편안하게 살라는 위로받았다. 이런 경우가 늙었다는 증거다.

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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