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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여름과 노란 가을, 그리고 ‘이름 없는 소녀’
푸른 여름과 노란 가을, 그리고 ‘이름 없는 소녀’
  • 제주일보
  • 승인 2019.07.12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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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바람의 고향, 초원의 나라 몽골
몽골 국민 휴양지 테를지(下)
가을철 찾은 테를지. 우리나라처럼 울긋불긋한 단풍은 아니지만 가문비나무와 자작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장관이다.
가을철 찾은 테를지. 우리나라처럼 울긋불긋한 단풍은 아니지만 가문비나무와 자작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장관이다.

어느 날 제주 오름을 올랐더니 뻐꾸기가 뻐꾹~ 뻐꾹~ 하고 울며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려줍니다. ‘이제 길을 나설 때가 됐구나하고 몽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아직 몽골에 도착하기 전인데도 초원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습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따로 있지만 우선 테를지에 며칠 있으면서 지난해 돌아보지 못한 곳을 둘러보며 촬영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테를지란 명칭은 식물 이름에서 유래됐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각시석남으로 불리는 식물입니다. 상록활엽 소관목으로 높은 습지에서 자라는 고산식물입니다. 테를지 전경을 멀리서 살펴보면 바위산이 바람을 막고 물이 흐르며 적당한 습지를 형성해 다양한 식물이 자생하기에 안성맞춤인 듯합니다.

다시 찾은 테를지. 이번에는 몽골의 석상 학자 바에르교수와 동행했습니다. 강을 건너 테를지 입구에 들어서자 저는 차에서 먼저 내렸습니다. “걸어서 거북바위가 있는 곳까지 갈 테니 먼저 가 있으라고 말하며 1시간 후 만날 것을 약속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얼마간은 별 어려움이 없이 촬영하며 바쁘게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큰 실수였습니다. 몽골은 워낙 청정 지역이라 거리감이 우리나라와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금방이라도 갈 것 같은데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습니다.

어느 해 여름 다른 일정을 마치고 찾은 테를지. 바위산 언덕 위에 올라 내려다 보니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어느 해 여름 다른 일정을 마치고 찾은 테를지. 바위산 언덕 위에 올라 내려다 보니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거북바위는 보이지 않고 목은 타들어 갑니다. 죽을 힘을 다해 걷다 보니 한 게르(Ger)가 보입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있어 서툰 몽골말로 물 좀 달라고 하니 못 알아들었는지 반응이 없습니다. 그때 한쪽에서 양젖을 짜던 소녀가 한국말로 아저씨, 한국 사람?”하고 묻습니다. “한국말을 하느냐?”고 되묻자 소녀는 조금 한다며 물 대신 양젖을 발효시킨 아이락 한 그릇을 건넵니다. 목을 축이고 나자 거북바위를 가려면 얼마나 더 걸리는지 물었습니다. 소녀는 여기서는 너무 멀어 말을 타고 가야 한답니다. 결국 말을 얻어 타고 거북바위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거북바위에 도착하니 난리가 났습니다.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 제가 안 보이자 바에르 교수가 저를 찾으러 나갔다는 것입니다. 말을 태워준 몽골 사람에게 사정을 말해 다시 돌아가 바에르 교수를 찾아 돌아왔습니다.

이후 몽골을 갈 때마다 테를지를 찾았습니다. 어느 해 여름 일정을 마치고 다시 테를지를 갔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비를 피해 게르 앞에 서 있는데 초원 너머로 파란 하늘에 쌍무지개가 생겨나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테를지 초원에서 만난 몽골소녀 네르구이. 그녀의 이름은 ‘이름 없는 소녀’란 뜻을 가지고 있다.
테를지 초원에서 만난 몽골소녀 네르구이. 그녀의 이름은 ‘이름 없는 소녀’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때 한 몽골 소녀가 땔감을 들고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무지개를 등진 소녀의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그 소녀는 울란바토르 호텔 테를지 캠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이름은 네르구이. ‘이름 없는 소녀라는 뜻이랍니다.

자신이 태어날 때 아버지가 아직 이름을 못 지어 의사가 서류에 이름 없는 소녀라고 기록했는데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 됐다고 합니다.

테를지 초원에서 만난 몽골소녀 네르구이. 그녀와의 사연이 몽골 일간지에 소개되 기도 했다.
테를지 초원에서 만난 몽골소녀 네르구이. 그녀와의 사연이 몽골 일간지에 소개되 기도 했다.

이 소녀를 주제로 사진을 찍으면 어떨까 싶어 의향을 물었더니 흔쾌히 승낙합니다. 여러 곳을 배경으로 소녀의 사진을 찍었고 1년 후 이 사진들을 모아 이름 없는 소녀의 꿈이란 자그마한 사진집을 만들었습니다. 사진집을 받아든 소녀는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연이 몽골 현지 신문에 크게 실렸고 몽골의 유명 영화배우가 이 기사를 보고 자신의 사진집을 만들어 줄 수 있느냐며 문의하기도 했습니다.

테를지는 가면 갈수록 신비감이 숨겨져 있습니다. 깊숙이 들어가 보니 밖에서 보는 것보다는 또 다른 모습이고, 곳곳에 습지들이 있어 야생화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습니다. 말을 빌려 타 언덕에 올라가면 넓게 펼쳐진 거대한 바위산과 숲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합니다. 높은 바위에 앉아 테를지를 내려보다가 문득 이곳의 사계절을 촬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몽골의 사계절은 뚜렷하게 표현할 것이 별로 없는데 이곳 테를지는 숲이 있어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언덕을 내려와 이곳 주민에게 계절별 모습이 어떤지 물어 보니 가을에 나무가 물들면 장관이라고 합니다.

그해 가을, 몽골 전통 결혼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10월 울란바토르를 거쳐 한 시골 마을을 찾았습니다. 몽골 전통 결혼식은 처음이라 기대했으나 생각보다 너무 평범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테를지를 들렀는데 온 산의 나무들이 노랗게 물들었습니다. 이틀 동안 테를지 가을 모습을 촬영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울굿불긋한 단풍은 아니지만 가문비나무와 자작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장관이었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울란바토르로 왔는데 다음 날 아침 하얗게 눈이 내렸습니다. ‘노란 단풍과 하얀 눈을 상상하며 서둘러 테를지로 향하는데 길에 눈이 너무 쌓여 그냥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안타깝던지. 결국 아쉬움을 뒤로하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계속>

<서재철 본사 객원 기자>

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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