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안’
‘성안’
  • 정흥남 논설실장
  • 승인 2016.03.0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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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서울 한복판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을 통해 서울시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글귀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이다. 풀꽃은 말 그대로 풀에 피는 꽃이다. 인위적으로 개량 된 꽃이 아닌. 우리의 들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들풀에 핀 꽃이다. 그만큼 정겹고 우리 곁에서, 우리와 늘 함께하는 말 그대로 우리의 꽃이다. 이 때문에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어려운 우리사회에 큰 힘과 감동을 선사했다. 지금도 이 글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긴 상처를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사랑받고 있다. 풀꽃은 나아가 우리의 고향이 어디이고, 우리가 돌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사회엔 빠름과 신속함 즉, 속전속결이 있었을 뿐 ‘느림’은 거추장스럽고 낭비적 단어로 통용돼 왔다. 할일 없는 사람들의 게으름과 대등한 용어로 사용됐다. 그런데 그 느림이 최근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전국에 수많은 올레길이 생겼다. 사람들은 자신의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 걷기에 투자하고 있다. 빠름 보다 느림으로, 되돌아봄으로 삶의 풍요로움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슬로시티가 대세가 됐다.

#최근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제주시 ‘성굽길’ 걷기 행사를 가져 이목을 끌었다. 원 지사는 관덕정 광장을 시작으로 구 제주대학교 병원, 오현단, 남수각, 기상대(공신정터), 고씨주택 등 원도심 문화·역사 자원에 대한 답사를 벌였다. 이번 행사는 제주도가 제주시 원도심을 살리기 위한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면서 사전 답사차원에서 이뤄졌다. 성굽길은 과거 제주성이 있던 터를 중심으로 조성된 길이다. 제주성은 과거 제주의 정치·사회·경제·문화의 중심지로, 현 제주시의 발원지다. 이른바 ‘성안’으로 더 친숙하게 불린 이곳은 성 밖 사람들에게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제주도청과 교육청을 비롯해 교육·금융관련 시설 등이 모두 원도심 주변에 집중돼 있었다. 칠성로는 패션·쇼핑의 일번지로 명성을 날렸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제주시 외곽 중심으로 도시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원도심을 지탱해 온 행정·교육 기관들이 이들 지역으로 이전했다. 이와 함께 원도심 일대 유동인구가 줄어들고, 급기야 주거환경 마저 개선되지 않아 주민들이 썰물 빠지듯 떠났다. 1000년 넘게 제주의 중심으로 찬란했던 제주시 원도심이 불과 30여년 만에 쇠로의 길로 접어들었다. 지방자치가 실시되면서 원도심을 살리려는 시책들이 모색되기 시작됐다. 선거 때 마다 ‘원도심 살리기 공약’이 이어졌다. 그러나 떠나간 주민들의 발길을 돌리지는 못하고 있다.

#제주시 원도심을 살리자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지금껏 많은 투자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결실이 없다는 점이다. 지역주민들이 생각과 기대를 담지 못한 사업들이 이뤄진 때문이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만큼 관이 주도할 수밖에 없지만, 그 과정에서 주민들을 제대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대부분 사업들이 주민을 들러리로 만들었다. 사업의 주체로 정당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도시개발 전문 용역회사가 제시하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도시개발 모형도’가 사업의 중심에 섰다. 원희룡 제주도정은 ‘사람과 자연의 공존’을 강조하고 있다. 제주시 원도심 재생사업 또한 예외가 아니다. 제주의 정체성과 대치 논란을 낳을 수 있는 초고층 건물을 지어 원도심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여겨선 안 된다. 원도심 재생사업은 지역의 역사성과 남아있는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동시에 주민의 삶의 질을 끌어 올려야 한다. 또 이곳을 찾는 시민과 관광객들이 원도심 일대를 찬찬히 걸으면서 제주의 문화를 음미하고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모여들면 지역에 생동감이 돌고 닫혔던 가게 문도 열리기 마련이다. 사람이 모여야 지역이 사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풀꽃처럼 은은함과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람과 역사·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를 그려야 한다. ‘성안’에 가겠다는 사람들이 넘쳐야 성공한 ‘원도심 재생사업’이다.

정흥남 논설실장  jh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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