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는 왜 상하이를 택했나
임시정부는 왜 상하이를 택했나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4.08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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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 전 서울신문 편집부국장·논설위원

1912년 상하이의 가을 밤. 한 젊은 청년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김신부로 인근 신천 지역에서 서성인다. 담배를 피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인다.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걷는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그러나 곧 비장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생긴 집으로 들어간다. 낡은 책상과 의자에 오며 가며 걸터앉았다가 일어선다. 잠시 상념에 빠진다. 파르르 떨린 입술에서 뭔가 내뱉는다.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 망국(亡國)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 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 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 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신규식, 3·1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이다. 그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기획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계자로 평가받는다. 나라를 위해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 과정에서 한 쪽 눈을 잃었다. 그래서 호를 예관(睨觀)이라 했다. 흘겨볼 자인데 일본놈들을 흘겨보겠다는 뜻에서 그렇게 정했다. 그가 초기 임정을 중국 상하이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잠깐 시 한 수 보고 가자.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종로의 인정(人定)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로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며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일제 강점기 때 조선 광복을 염원하며 쓴 시다. 1960년대 세계적인 시학 이론을 세운 C. M. 바우라(영국 옥스포드대 교수)는 그의 책 시와 정치에서, 놀랍게도 한국의 심훈을 얘기한다. 당시 세계는 한국이 어디에 붙어있는 땅덩어리인지도 잘 모를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이야 말로, 세계 저항시의 으뜸이라고 평가했다.

우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올릴 때 상하이를 대표적으로 떠올린다. 19193·1운동 직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태동했고 이후 여러 곳을 옮기며 활동한다.

이동 경로는 이러했다. 상하이(19194~19325)~항저우, 자싱(19325~193410)~난징, 전장(193411~193711)~창사(193712~19387)~광저우, 퍼산(19387~193810)~류저우(193811~19394)~치장, 충칭(19395~194511) 등을 거쳐 광복을 맞는다. 이동 과정에서 임시정부 인사들은 한 곳에 집중해서 있기보다 분산해서 거주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서이기도 하지만 도시 지역보다 주변 지역이 거주비가 싸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

20191월 상하이 영안백화점 옥상에 있는 기운각(綺雲閣, 비단 구름의 누각) 앞에서 신년회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 공개됐다. 사진에는 신규식, 신익희, 김구, 안창호 등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물이었다.

그렇다면 임시정부 탄생지가 왜 상하이였을까. 근대 개화기부터 한국인들이 드나든 주요 도시 중 하나가 상하이였다. 처음에는 인삼 장사를 비롯한 상인들이 왕래하다가 점차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인사들이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1910년 나라를 잃자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면서 상하이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도시가 됐다.

그런 가운데 한국인들에게 주목을 받은 지역은 단연 프랑스 조계였다. 프랑스는 자유와 평등을 이상으로 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조계 안에서 비교적 간섭을 덜 받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일본의 주권이 미치지 않아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기에 용이한 편이었다. 프랑스 영사관이 신변 보호를 해줄 것이란 기대감도 있었다. 따라서 독립지사들이 이곳으로 자연스럽게 집결했다. 게다가 상하이는 망명객, 위험 인물, 낙오자, 부패분자, 낭인호객 등 잡다한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즉 익명성이라는 장점도 있었다. 이처럼 상하이는 자유의 도시이며 평화의 이상향이나 마찬가지였다.

임시정부 100, 한 번쯤 알고 지나 봄직 아니한가.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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