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으로 표현한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
글·그림으로 표현한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4.0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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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추천하는 이달의 책]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순천 한글교실 할머니들의 그림집
고향·가족·꿈 등 그림일기에 담아
눈물과 감동의 인생 드라마 ‘뭉클’
순천시 평생학습관 한글작문교실 초등반 할머니들의 작품들.
순천시 평생학습관 한글작문교실 초등반 할머니들의 작품들.

유튜브에 들어가면 새로운 영상 올라온 거 없나?’하고 꼭 클릭해보는 계정이 있다. 유튜브 80만 구독자를 자랑하는 코리아 그랜마’(Korea Grandma) 47년생 박막례 할머니의 계정이다. 칠십몇년을 살아가면서 생전 처음 해보는 경험들을 손녀와 함께 감행하며 깔깔거리며 웃는 할머니의 모험담(?)이 담긴 영상이 가득하다.

해외여행, 캐릭터 초콜렛 만들기, 메이크업, 먹방(?)까지, 갖가지 주제의 콘텐츠들 중에서도 유난히 마음에 남았던 영상이 있었다. 속옷회사로부터 제품을 함께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고 스케치북에 얼기설기 그림을 그려 디자인을 해보려던 할머니가 갑자기 손녀에게 짜증을 내며 방에서 나가라고 한다. 혼자 방안에서 왜 우리 부모님은 나한테 공부를 안 시켜줘서 이렇게 바보같이 그림도 못 그리고 있을까하고 한참을 울다가 다시 연필을 들고 끼적댄 나름의 디자인이 담긴 스케치북을 손녀에게 수줍게 보여주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 이상하게 뭉클한 감정이 밀려온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책을 서점에서 만났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는 순천시 평생학습관 한글작문교실 초등반에서 한글을 배우신 할머니들이 순천시립그림책도서관의 내 인생 그림일기 만들기수업을 들으며 쓰고 그린 그림책이다. 고향, 가족, 꿈 등 할머니들의 인생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들을 그림일기로 표현해내는데, 처음에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과감한 색감과 선의 그림들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화가의 그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독특한 개성이 묻어나는 화려하고 밝은 색깔의 그림들, 그 옆에 실린 할머니들의 삶을 덤덤하게 써 내려간 글로 시선이 옮겨가면서 한참 동안 페이지에서 머물게 된다.

시부모님과 남편에 대한 원망, 자식에게 못 해준 것들에 대한 후회 등 인생의 고단함이 묻어나오는 글을 읽으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 속에서 살포시 드러나는 유머를 보면 삶을 대하는 할머니들의 긍정적인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엄지발가락에 반해 결혼을 결심한 장선자 할머니처럼 말이다.

이모 집에 심부름을 갔는데 모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나와 선 볼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맘에 안들었습니다. 그런데 구멍 뚫린 양말 사이로 보이는 하얀 엄지발가락이 갑자기 멋있어 보이고 맘이 갔습니다.’ (장선자 할머니)

할머니들이 글을 배우기 이전의 마음을 쓴 일기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있다. ‘부끄러웠다’ ‘창피했다라는 말이다. 글을 읽지 못해 안으로 숨어들었고 세상으로 나가지 못 했다고. 자신이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결국 사형선고까지 받아들였던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의 한나처럼 문맹은 당사자들에게 수치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문맹은 미성년 상태를 의미한다. 한나는 읽고 쓰기를 배우겠다는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가는 첫 걸음을, 깨우침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사형선고를 받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한나는 글을 배운다. 박막례할머니는 유튜브를 시작했고 순천할머니들은 한글을 배우고 전시를 하고 그림책을 낸다. 글을 배우고 마을 이장이 되고 싶다고 숨겨둔 야망을 드러내는 할머니도 있다. 한나와 순천할머니들 그리고 박막례할머니까지 남아있는 나날을 이전과 같은 상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나아지기 위해 배우고 도전한다. 이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할머니들의 삶에서 존엄을 배운다.

책에 마지막 부분에 담긴 순천할머니들의 자화상들은 박막례할머니의 얼굴과 들뜨거나 어그러짐 없이 잘 포개진다. 수줍지만 뿌듯해하는, 어떤 긍지가 담긴 빛나는 얼굴들. 그런 얼굴들을 좀 더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이 책을 권한다.

<강희진 한수풀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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