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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애국계몽운동가들이 집필한 국사교과서
한말 애국계몽운동가들이 집필한 국사교과서
  • 제주일보
  • 승인 2019.01.10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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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 卷一(1906)

원영의-유근 편찬…편년체 형식으로 개설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서문 쓰고 교열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 卷一 속표지(心筌 安中植 題字)와 서문.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 卷一 속표지(心筌 安中植 題字)와 서문.

이런 저런 책들을 모으다 보면 유별나게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책이 있다. 그 책의 가치가 높고 낮음을 떠나서 개인적인 인연이 있거나 특별한 사연을 품고 있는 책인 경우, 사람인지라 많은 책들 가운데서도 좀 더 눈에 밟히게 마련이다.

몇 년 전에도 서울 출장길에 우연히 그런 책을 만난 적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 박물관에 있는 친구에게 그 책 자랑을 했다가 제주로 함께 귀가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강탈(?)당하고 말았다.

때 마침 그런 종류의 자료를 수집하는 중이니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자기네 박물관에 전시하는 게 더 옳은 선택이라는 그 친구의 주장에 반항도 못하고 그리 할 수밖에 없었다. 만나자 이별이라 아쉬움이 컸지만 언젠가 그 책과 다시 인연이 닿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막연한 기대감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인터넷에서 일제강점기 간행 서적 10여 권이 묶음으로 나온 것을 발견했다. 구체적인 출판 시기나 제목 목록도 없고 사진도 흐릿한 상황이었지만 뭔지 모를 친근감에 응찰하고 말았다.

며칠 후 도착한 책 꾸러미를 풀어 보니 그 근거 없는 친근감의 정체가 드러났다. 몇 년 전의 바로 그 책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1906(光武 10) 휘문의숙 인쇄부(徽文義塾印刷部)에서 간행한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卷一)였다.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 卷一 서문 뒷부분과 역대제왕도.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 卷一 서문 뒷부분과 역대제왕도.

당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인 원영의(元泳義)와 유근(柳瑾)이 편찬하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유명한 장지연(張志淵)이 교열하고 서문을 쓴 책이다.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개설한 한말(韓末)의 국사 교과서로 제1권은 단군조선~통일신라, 2권은 고려시대를 수록하고 있다.

비록 이 책의 구성이나 내용이 전근대적이고 역사적 사실을 단순하게 나열하는 편년체 형식으로 일관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장지연의 서문을 통해 이 책의 간행 목적이 조국 정신을 환기’(喚起祖國之精神)하고, ‘애국의 혈성을 배양’(培養其愛國之血性)하며, ‘독립 주의를 널리 퍼지게’(闡獨立之主義)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휘문의숙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 책은 곧 통감부에 의해 발행이 금지되었고, 저자의 한 사람인 원영의는 이 책을 허리춤에 넣고 교실에 들어가 몰래 가르치는 편법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휘문의숙의 후신인 휘문중학교가 지금의 강남 대치동으로 학교를 옮긴 후 첫 입학생이었던 필자가 1학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세상 좋아져서 너희 같은 촌놈들이 우리 학교에 다닐 수 있으니 운 좋은 줄 알아라’(비록 몇몇 선생님이셨지만)였다. 얼마 후 전국모의고사 성적이 발표되고 나서 그런 말들은 쏙 들어갔지만, 당시에는 그 너희 같은 촌놈들이라는 말이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되기도 했었다.

그 시절 배운 교훈(校訓)큰 사람이 되자였다. 요즘 모교 설립자의 친일경력이나 그 후손들의 재단과 관련한 안 좋은 소식들이 종종 들릴 때 마다 드는 생각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큰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기 전에, 스스로가 사람부터 되는 게 먼저 아닌지.

 

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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