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돌하르방 장인'...돌에 생명력 불어넣다
전설이 된 '돌하르방 장인'...돌에 생명력 불어넣다
  • 김현종 기자
  • 승인 2018.12.11 1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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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제주인 15) 故 장공익 석공예 명장
60여 년간 돌챙이 외길인생...제주색 깃든 돌하르방 표준 정립
독창적인 석조물 창작에 심혈...1993년 석공예 명장 칭호 받아
"제주자연은 보물, 반드시 지켜야"...금능석물원은 아들이 운영
故 장공익 석공예 명장

한 돌챙이가 있었다.

돌챙이는 한평생 정과 끌, 망치를 벗 삼아 돌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국가는 그에게 석공예 명장(名匠) 칭호를 부여했다.

() 장공익 명장. ‘제주의 얼굴인 돌하르방의 표준 외형을 정립하고 제주의 향토색을 다양한 석조물에 입혔던 돌문화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다. 고향에 대한 애정이 동력이었다.

장 명장은 지난 91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돌챙이는 석수(石手돌을 다뤄 물건을 만드는 사람)를 일컫는 제주방언이다.

 

바위를 공깃돌처럼 다뤘던 작은 거인

그는 60여 년간 돌과 씨름하는 외길을 걸었다. 신장이 1m60도 안 될 만큼 왜소한 체구였지만 거친 바위를 마치 공깃돌을 다루듯 쪼고 깎고 다듬던 작은 거인이었다.

고인은 해병대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먹고살기 위해 돌을 마주했다. 27세였다.

그는 제주가 관광지로 부상하던 당시 관광공예품으로 유행하던 돌하르방과 해녀, 옹기, 정동모자 등을 돌로 만들었다. 생전 고인은 돌챙이로 평생 살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고인이 석공예로 명성을 얻은 출발은 돌하르방이었다. 손재주가 뛰어났던 장씨는 민예품 경진대회에서 돌하르방 작품으로 잇따라 우수성적을 거뒀다. 돌하르방이란 별명도 따랐다.

그가 화산송이(스코리아)로 예쁜 돌하르방 소품을 만들었더니 육지에서 곧잘 본떠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돌하르방은 석수에 따라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고인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 만들 수 없는, 육지에서 모방할 수 없는 돌하르방을 만들겠노라고 결심했다. 제주도 민속자료로 지정된 원조 돌하르방 48(1기는 미완성품)를 토대로 이목구비를 포함한 외형을 조형하되 관광 상품으로 매력을 높이기 위한 실험을 거듭했다.

그 결과 현무암으로 빚어진 1m 이상 큰 키의 돌하르방들이 탄생했다. 얼굴은 부리부리한 퉁방울눈에 꼭 다문 입술, 길고 뭉툭한 코를 한 채 한쪽 어깨를 치켜 올린 모습이었다.

제주 관문이나 주요 관광지를 비롯한 도내 곳곳에 서있는 돌하르방들의 시조 격이다.

고인은 1993년 노동부로부터 석공예 명장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가 생전 제작한 돌하르방만 10만점을 넘는다. 한창 시절에 하루 수십 점을 깎았다.

고인이 제작한 돌하르방은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빌 클린턴과 고르바초프, 주룽지를 포함해 세계 40여 개 국 대통령이나 지도자들이 그의 돌하르방을 선물로 받았다.

미국 샌타로사시와 중국 라이저우시, 캐나다 밴쿠버시 등에는 그의 돌하르방이 세워져 있다.

 

제주를 돌에 새기다제주 자연은 보물

생전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명장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돌과 벌인 고된 사투의 증거이자 석공예와 함께한 인생의 훈장이었다. 무릎에만 흉터가 15개를 넘을 정도였다.

돌을 떡 주무르듯 했던 고인에게 돌이라고 같은 돌이 아니었다. 돌의 특징을 간파했다.

장 명장은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와 북촌리, 조천읍 함덕리 일대 현무암만을 작품 재료로 사용했다. 그는 생전에 돌의 결이 고르기 때문이라며 다른 지역의 돌은 결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나있어 깎다 보면 균열이 가기 일쑤다. 송이는 무르고 현무암은 질기다고 설명했다.

특히 고인은 제주고유의 것들이 사라지는 현실을 아쉬워했다. 그는 생전 옛것은 박물관에 있다지만 근대 이후의 것은 노년세대 기억에만 남아있을 뿐이라며 지역민들의 생활에 배어있는 고유 향토문화와 토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것이 세계적인 경쟁력이라고 갈파했다.

고인은 명장의 반열에 오른 후 제주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작품에 담는 데 혼을 쏟았다.

실제로 그가 제작한 석조물들은 제주 향토색과 정서가 투영돼 정겹고 재기발랄하다. 성적이지만 외설스럽지 않고 익살스러우나 천박하지 않다. 풍자가 돋보이고 해학이 관통한다.

고인의 23녀 중 셋째이자 차남인 장운봉씨(51)는 부친에게 석공예를 전수받은 후 금능석물원을 운영하고 있다. 장씨는 아버지는 자연환경이 무차별 훼손되는 상황을 많이 걱정하셨다제주자연은 가장 소중한 보물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장씨는 석물원도 주변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조성했다자식 이전에 제자로서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석공예를 통해 제주를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금능석물원은...

제주시 한림읍 소재 금능석물원은 장 명장의 생전 작업장이자 작품 전시장이다.

돌하르방과 순수 석공예 창작물 30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제주다운 석물일색이다.

제주 옛이야기가 깃든 조형언어의 스토리텔링이 펼쳐진다. 김녕사굴 전설의 휼민상, 잠녀들이 자식 돌보는 해녀군상, 물허벅 진 여인상, 꼬마들이 노는 구동자상, 대변 누는 동상.

작품들은 익살과 해학이 압권이다.

례로 코부자등신상은 남자 코에 생식기가 달린 작품으로, 얽힌 얘기가 폭소를 자아낸다. 사연인즉슨 술 취해 자다 깬 남성이 깜깜한 부엌 찬장에서 물병을 찾다가 도끼를 건드렸다. 도끼가 떨어지면서 그의 돌출부위를 차례로 잘라버렸다.

그때 신체가 잘려도 따뜻할 때 붙이면 말짱해진다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옳다 싶어 황급히 바닥을 더듬어 뭔가를 주은 남자는 얼굴에 갖다 붙였는데 그만 위아래가 바뀌고 말았다.

설문대할망은 고인의 역작이다. 제주 섬을 창조한 신화 속 여신 설문대할망이 높이 6m(기단 포함 8m)의 위풍당당 석물로 제작됐다. 500장군은 아기들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매달려 있다.

특히 고인은 설문대할망이란 거녀(巨女)를 형상화하기 위한 고민 끝에 유방 3개에 유두를 5개씩 다는 기치를 발휘했다. 설문대할망은 무게 100t으로 제작 후 일으켜 세우는 것도 골칫거리였다. 석상의 무게를 감당할 만한 장비가 제주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평화로에 고가도로를 건설할 당시 대형 크레인이 물을 건너오자 이를 빌려다가 설문대할망을 세웠다.

동심의 고향은 그의 고향인 한림읍 상대리 한산왓마을을 재현한 작품이다. 제주의 원형적인 생활문화가 엿보인다. 43의 아픔도 서려있는데, 실제 한산왓마을은 43 당시 사라졌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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