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락(三樂)’ 가을나들이
‘삼락(三樂)’ 가을나들이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11.1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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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호 시인·전 중등교장·칼럼니스트

얘야, 너 몇 살이니?”

여섯 살.”

나는 일흔 살인데, 너하고 난 동창이다. ‘6·3 빌딩동창.”

제주삼락회(三樂會)는 제주도 초·중등 퇴직교원 모임이다. 월전(月前)에 반도 육지로 가을나들이 다녀왔다.

‘6·3 빌딩이 일정(日程)에 들어 있었고, 엘리베이터 순서를 기다리는데, 옆에서는 유치원 아이들이 재잘대고 있었다. 그 중 한 아이와 주고받은 대화이다.

 

고희(古稀)에 이르러서도 ‘6·3 빌딩은 초행(初行)이었다. 이것은 부끄러워 할 일도 아닌데도 부끄러운 일처럼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아이와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동료가 그럼 나도 동창이네라며 끼어든다. 함께하는 행차(行次) 아니면 이곳에 굳이 혼자서 와보려 할 이가 있겠는가. 어찌하여 이런 말이 오갔던지, 예순 넷 차이를 둔 ‘6·3 빌딩 동창끼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즐거움()이란 별난 것인가. 이것 또한 일락(一樂)이 아니겠는가.

 

즐거움()이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추석, 먼 길을 온 손자들의 할아버지!’ 부르는 소리에는 온 세상이 쾌청(快晴)하다. 나이가 들수록 누구에게나 그럴 것이다. 맹자의 삼락(三樂)은 어떤 것인가. 첫째, 부모가 다 살아있고 형제가 무고(無故)한 것이요, 둘째는 하늘을 우러름과 주변을 대함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요,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가르치는 것이라 했다.

 

바위벽에 새긴 돌부처도 세월에 닳아 뭉그러진다. 부모형제 무고는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하늘과 이웃에 대한 부끄러움도 열정(熱情)에 묻히는 순간이 없을 것인가? 아이를 낳음도 뜻대로 되지 않는데, 가르침에서 천하의 영재를 고르려함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장애(障碍)는 누가 가르칠 것인가? 맹자의 즐거움을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생각해 보는 것, 또한 즐거움이 아닐 텐가.

이런 연상(聯想)들을 싣고 버스는 이윽고 청령포(淸泠浦)에 닿았다. 단종(端宗)이 유배되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올 때마다 속이 아리다. 정선아리랑 가락처럼 뭉쳐진 한()의 가닥들이 실오라기 되어 풀려 나온다.

소나무도 눈()이 있는가, ()가 있는가? 단종의 애처로운 그 모습 다 보았다며(), 한숨짓는 소리() 다 들었다며, 관음송(觀音松)은 긴 세월 두고두고 증인처럼 서있다. 졸시(拙詩) ‘청령포에서를 싣는다.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내림이나/ 청령포 서강(西江)이 알로 흐름이나/무엇인가 다를 게 어디 있다 하랴/욕심을 버리라고 강은 저리 흐르고/욕심을 벌이려고 사람들은 그리 걷는가//숙부와 조카는 수원(水源)이 같은데/무엇이 그 줄기를 갈라지게 했었는가/땅거미에 마냥 짖으며 짐승은 다가오고/사립짝 닫아걸면 아리게 그리운 엄마 품/그 소릴 빠뜨리지 않고 다 보았다 한다/관음송(觀音松) 팔 휘저어 저리 아니 섰는가//中略/세월 엮어온 눈길들 그 위를 밝혀 잦다/中略//강은 예나 흐르고/세월 덧 바뀌어도/옛 그 소리 예서/들려 아니 오는가

 

단종의 능호(陵號)는 장릉(莊陵). 무덤()은 언덕()처럼 흙()지붕이다. 그 앞에서는 누구나 인자한 걸음()’을 걷는다. 세월이 아주 지나 늦게 온 사람()’도 급하지 않다. 무덤(+++)의 한자구성이다.

 

한성(漢城)‘6·3 빌딩에서 손자뻘과 동창 맺었고,

동구릉(東九陵)에서 조선왕들과 묵언(黙言)소통하여,

장릉에서 단종의 넋에 한라산 소주방울 고수레 하는

탐라부생원(夫生員)의 가을 편락(編樂) 한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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